돌아온 도시에서 다시 시작
자전거를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안정되는 듯 했으나
돌아온 도시는 파주, 파주출판도시에서 걸어서 30분, 자전거로 15분이면 다닐 수 있는 신도시였다. 남편이 파주출판도시에 직장을 구했기 때문이다. 나무는 중학교 3학년에, 작은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낯선 도시, 하지만 신도시답게 마을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아파트 단지 앞에는 농구장이, 바로 옆에는 청소년센터가,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좋은 도서관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동네 이름도 ‘책향기 마을’. 뭔가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마을에는 뜻하지 않게 좋은 이웃들이 많이 있었다. 예전 마을에서 알고 있었던 인연이 연결되기도 하고, 동창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그들은 모두 우리 가족을 환대해 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안 좋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무의 증상이었다. 여전히 기복이 있었다. 학교는 특수학급으로 배치되었다. 특수학급에서도 받을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별로 없었다. 엎드려 자기만 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나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무는 대학로에 있는 병원과 파주 학교를 오가며 겨우 출석일수를 맞추고 중학교를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도 특수학급으로 신청을 했다. 두꺼운 서류를 준비해서 교육지원청에 냈고, 특수학급 승인을 받았다. 그다음은 경기도 교육청 심사였다. 그곳에서는 탈락이었다. 탈락 이유는 나무의 기능이 많이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특수반은 중학교 특수반에 비해 학습수가 현격하게 줄어든다. 게다가 의무교육도 아니기 때문에 특수학급 심사 기준이 높다. 신체장애만 대상이고, 정신장애는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기능이 회복되어서 특수학급이 안된다니. 하루에 12시간을 자야 하고, 정신증으로 인한 인지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에게 일반 학급에서 공부를 하라니. 아침 8시에 등교하고 자율학습을 하는 입시 위주의 일반학교에서 이 아이가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분노했다. 행정소송을 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나무에게 에너지를 쓰기에도 벅찼다. 우리 가족은 고민 끝에 지역에 있는 대안학교 문을 두드렸고, 대안학교 고등과정에 들어갔다.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도 우리의 결정을 응원해 주었다.
대안학교에서 나무는 선생님들이 나를 사람으로 대해줘서 좋다고 했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줘서 좋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반학교에서는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았다는 것인데. 아픈 와중에도 나무는 자신이 존중받는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어쩌면 아프기 때문에 더 잘 알아챘을 것이다. 조현병 환자들은 감각이 예민하다. 인지는 엉키고. 아프기 때문에 존중이 더 중요한데, 아이는 일반학교에서 무시와 멸시를 받았던 것이다.
대안학교에서 나무는 자전거를 배웠다. 담임교사와 함께 자전거를 탔고, 다른 학부모가 아침마다 학교까지 자전거로 함께 등교를 해 주었다. 그때 좋아하기 시작한 자전거를 나무는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대안학교에서 곤충에 대한 연구를 했다. 아프기 전부터 좋아했던 장수풍뎅이, 사슴벌레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어나 수학 수업은 따라가기 어려웠다. 벌써 4년 동안 공부를 못한 데다가 인지 기능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과정 수업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안학교에는 나무가 불안장애가 있다고 말했다. 나무는 조현병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고, 우리 부부 역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현,병, 이 세 글자가 가지고 있는 낙인이 어떤 것인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으므로.
대안학교에서의 뜻깊은 시간도 3학기로 끝났다. 2학기 때 다른 형들과 함께 고졸 검정고시를 보았다. 초등학교 때 공부한 걸로 한 번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리고 나무 학년에 학생이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업도 애매했다. 그렇게 3학기 만에 고등과정을 마친 나무는 홈스쿨링 아닌 홈스쿨링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나는 2012년 4월부터 풀타임으로 공공기관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나무의 병이 평생 가는 병이고, 나무와 나와의 건강한 거리 두기가 되어야 이 장기 레이스를 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 병원비를 대려면 남편 혼자 일해서는, 내가 강의를 해서 부정기적으로 벌어서는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귀촌하고 도시로 돌아오면서 경제적인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로써 나는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 사이 작은 아이는 3번째 전학한 새 학교에 적응해야 했다. 이번에는 '강한 아이'로 보이기 위한 작전을 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언니들에게 맞고 다니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문제아와 개성 있는 아이 사이를 줄타기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남편은 새로운 직장에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고, 집에 왔다 갔다 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그렇게 파주에서의 시간은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가는 듯했다. 우리 가족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살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고, 견딜만 했다. 나무의 재발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