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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Feb 06. 2024

교육 찾아, 돌봄 공동체 찾아 삼만리

어머니는 대장암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우리는 귀촌을 하고

첫 입원을 하던 때는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가던 겨울이었다. 우리 가족은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해서, 아니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해 봄 이사를 결정했다. 아이 발병 한 달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응급수술을 한 시어머니와 분가를 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의 수술과 아이의 발병 후 1년 넘게 종합병원 두 군데를 왔다 갔다 하면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롱패딩을 뒤집어쓰고 병원에 가서 어머니 손발을 닦아드리고 아침밥과 아침약을 챙기고, 다시 집에 돌아와 아이 둘을 챙겨 학교를 보내고, 또 어머니 병원에 뛰어가고,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또 나무의 진료일에는 나무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매일매일 나무의 투약과 컨디션을 챙겨야 했다.

      

결국 우리는 아파트를 팔기로 했다. 처음으로 장만한 우리집을. 어머니는 병원 근처, 어머니가 사시던 동네에 전세를 얻어드렸다. 새 냉장고, 새 장롱, 새 세탁기를 갖추고, 꽃무늬 벽지로 도배를 했다. 2인용 식탁 세트도 준비했다. 신혼집 같았다. 누구는 말기 암환자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머니는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고, 남은 시간 동안 가장 이쁘게, 가장 고귀하게 사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집은 동네 사랑방이었고, 매일 어머니 친구분들과 동생들이 드나들었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일 년을 사셨다. 매일 기도하면서 사셨다. 나무를 위하여, 어머니 자신을 위하여.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 손주‧조카‧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우리는 나무 병원과 나의 일터가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때가 나무 6학년 5월이었다. 새로운 동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느라 아이 둘은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나무의 상태가 안 좋은 날들이 계속되면서 작은 아이는 동네에서 돌봄을 받았다. 동네 카페에서, 마을합창단에서, 마을무용단에서 아이를 돌봐주었다.  

    

나무의 중학교 진학도 고민이었다. 한참 아픈 상태에서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대안학교도 알아봤지만 아이의 질병을 이해하고 받아줄 만한 학교는 없었다. 결국 배정받은 일반학교에 진학했지만 예상대로 아이의 학교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보건교사는 아직 등교할 때가 아니라고 했고, 병원에서는 퇴원을 하라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우리는 나무가 앞으로 오래오래 아플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귀촌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이의 질병과 함께 살아가려면 마을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아이의 교육 문제, 진로 문제를 생각했을 때 농촌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년 9개월 투병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식 이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니 49재를 지내고, 어머니 전셋집을 정리하고,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고 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 부부가 숨 쉴 궁리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환자를 돌보느라 완전히 소진된 상태에서 회복하기 위한 결정이었는지도.


나무의 발병 3년 차, 2010년 5월, 우리 가족은 귀촌을 하게 된다. 그것이 나무가 중학교 2학년, 작은 아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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