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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Feb 13. 2024

좌충우돌 귀촌 생활

가족 구성원 각자 고군분투, 그 끝은?


귀촌을 하고 이삿짐을 푼 곳은 마을회관 2층이었다. 급하게 이사를 하다 보니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마을 이장님께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마을회관을 빌려주었다. 넓은 논을 내 집 마당처럼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황금색 들판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도 ‘금평리’. 우리는 금평리 마을회관 2층에서 두 달을 살았다. 그리고 빨간 지붕이 있는 시골집을 연세 200만 원에 빌려 이사를 갔다.

      

큰 아이는 면소재지 중학교로 전학을 했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에 전학을 했다. 나무는 여전히 증상이 잡히지 않아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출석을 하다 말다를 반복하고, 병원에 다니느라 결석도 많이 했다. 그래도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아빠와 곤충을 잡으러 가기도 하고, 이웃집에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지냈다.  


작은 아이도 적응이 어려웠다. 작은 아이는 오빠와 같은 중학교 언니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낯선 아이라는 이유로. 오빠 때문에 원하지 않는 전학을 두 번째 하게 된 작은 아이는 점점 예민해졌다. 게다가 사춘기 초기였다.      


퇴사를 한 남편은 나무를 돌보는 일과 농촌에서 새롭게 할 일을 모색하느라 바빴다.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서울을 오가며 일을 하면서도 아픈 큰 아이와 새로운 생활에 적응 중인 작은 아이를 돌보는 엄마 역할을 수행했다. 농촌은 성별 고정관념이 강고한 사회였다. 마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마을 모임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하는 것은 여자일, 마을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은 남자일로 구분되었다. 농촌은 남성 가장 뒤에서 튀지 않으면서 엄마 노릇에 충실한 여성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였다. 마을에는 도시에 나가서 일하는 여성이 많았다. 농사 수입으로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생활을 영위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나가서, 혹은 도시를 오가면서 일하는 여성에게도 모성 수행, 양육 책임은 최우선 과업이었다.

       

우리 가족이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는 동안, 귀촌 선배들은 호혜와 환대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집 구하는 것에서부터 아이들의 적응까지 성심성의껏 도왔고, 유기농 농사법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남편은 유기농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나는 마을합창단에 참여하는 등 농촌 생활에 적응할 즈음에도 나무의 증상은 잡히지 않았다. 나무는 약 복용을 거부했다.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환청과 망상은 나무를 괴롭혔고, 우리 모두를 힘들게 했다. 결국 나무는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했고, 우리 가족의 짧고 굵었던 귀촌 생활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남편은 병원비를 벌기 위해 다시 직장을 구했고, 우리는 남편 직장 가까운 곳으로 집을 구했다.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라도 그가 뛰어와야 하니까. 우리는 월세 보증금을 어렵게 장만해서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것이 2011년 2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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