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Apr 04. 2021

군바리와 고무신(01)

빛바랜 군바리 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데 耳順의 나이가 되다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45년 전 편지 철을 뒤적이다 보니 이름 모를  長文의 편지가 있네요.


혹시 입대 전 학교 앞 아지트 다방에서 가끔씩 DJ 박스 출입을 허락하며 보조 판돌이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연상의 DJ 이었을까?


보조 판돌이 시절(1974)


▯  빛바랜 군바리 편지


풀벌레 소리가 하루에 피로를 씻어주는 밤. 소나무 송진 냄새가 밤이슬에 젖어 애처롭습니다. 마을 앞 동구 밖에 승들이 마을을 지키는 그곳에 개구리의 청아한 음성이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밤.


당신은 장승의 설화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가르쳐주지 않는 그 장승의 설화가 생각나는 밤 이예요.


밤이 깊어갑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인간의 마성을 간직한 채로 사람들은 즐겁고 씩씩하고 재미있게 계절도 잊고 노는 세계에서 밤도 낮도 없이 정지된 곳에 버려진 것처럼 절망스럽습니다.


이 순간, 순간이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며 기다리기 힘든 순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그리울 뿐입니다. 사랑은 가뭄에 내리는 비같이 서로가 목마르게 갈증 나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닐 런지요.


밤. 그 뒤에 새벽이 오는 것처럼 사랑이란 삶의 바탕이기에 인간의 바탕이기에 무섭도록 절실한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람의 가장 깊은 곳으로 뿌리를 흔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사랑을 가지고픈 아름다운 욕망은 늘 그것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달이 보고프지만 아직 달은 없습니다. 가늘게 생겨서 둥글게 되고 둥글었다가는 다시 가늘어지는 달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습니다. 바다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밀려왔다 사라지는 그 파도위에 나의 마음을 띄워 보냅니다.


그리고 이 밤. 버들피리의 아름다운 가락이 우리의 영혼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자연이란 영원한 인생의 교사이듯이 마치 시간이 생명을 연쇄해가듯 ─.


이 밤의 절망스런 권태로움은 내일의 윤활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을 가지기 위해선 아픔도 슬픔도 극복해야 한다는 걸 알아요. 지금은 어둡지만 어두운 곳에서 신뢰합니다. 이 어두운 밤의 권태로움을 ─.  


소나무 한그루가 외로이 서있는 언덕에서 바람을 쐬고 싶습니다.


바람은 한포기 이름 모를 꽃이라 해서 바람을 더 쬐끔 주지 않아요. 나만이 아닌 너와나의 찬란한 밤을 위해서 나무도 바람도 풀도 꽃도 혼자서가 아니고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섭리들을 우리는 알아요.


서로에게 그늘을 주지 않는 생명체의 공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사랑의 자비는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멀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아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발자욱이 남아있는 언덕위에 당신의 발자욱이 따스함을 느낍니다.


소나무 한그루는 여전히 외롭고 바람은 여전히 불어오는데 ─.



어둠속에서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이리 눕고 저리 눕고 참을 만큼 참으면서도 참을 만큼 소중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차라리 싫은 걸 사정해 보려는 아픔의 노력이겠죠.


마음이 허전합니다. 오늘처럼 이 차가운 밤에 왠지 봄눈의 아름다움이 생각나는군요. 그 봄눈이 손바닥 위에서 녹아 물방울이 되는 것을 봤습니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되는 봄눈 그것은 아름다워요.


자연에 충실하지만 곧 녹아 없어지는 소멸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덧없지만 순수한 봄눈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봅니다. 삶은 결코 뒤로 돌아갈 수 없고 다만 시간을 재촉할 뿐입니다.


일분 이분 한 시간 하루 일 년... 시간의 단위를 뒤로 하면서 달아납니다. 어제란 과거란 오늘을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일 뿐입니다. 내일이란 오늘을 꿈꿀 수 있고 시간이 흐를 뿐입니다.


인생이란 물위에 떠있는 나무토막과도 같다고 누가 그랬는지. 누구나가 세상에 어느 생명이나 다 그렇듯이 잠이 어딜 가고 없는 적막한 밤에 시간이 묘약이 되어주는 온갖 아픔을 오지 않는 잠처럼 갈구합니다. 이 너무나 적막한 밤에 ─.


사랑이 날 부르면 난 가리다. 허망하고 가시밭길 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내 위에 내리면 나의 모든 것을 그 날개에 덮은 채 사랑의 가시가 나의 몸을 찌른다 해도 폭풍이 지나는 폐허의 공간에서 내 몸을 산산이 부딪치고 나를 울릴지라도 부서진 만큼 성취된 것이기에.



고요한 밤하늘에 조용한 오솔길에서 당신과의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며 꿈에 젖어 봅니다.


별을 바라봅니다. 별빛 속에서 당신의 눈을 찾아 그 별빛에 당신의 따뜻한 얼굴을 그려봅니다. 지금 제겐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필요한 밤입니다.


그리고 이 밤, 당신이 계신 먼 곳을 향해 걷고 싶은 충동이 앞서는군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은 더욱 차갑습니다. 별빛으로도 달래줄 수 없도록 당신을 그리는 마음 뼈가 저리도록 아픈 밤입니다.


사랑이란 악기와도 같이 그 멜로디의 리듬을 생각해 봅니다. 영혼을 담은 물은 악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연주하는 주자에 의해 아름다운 음악일 수도 그렇지 못한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도 악기와도 같을지 몰라요. 사랑이란 행복을 주는 반면 괴로움도 이별의 슬픔도 안겨주는가 봐요. 당신과의 이별에 순간에서 비로소 사랑의 깊이를 압니다.


신록의 만남이 버들가지를 유혹하고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 듯합니다. 버들가지에도 나뭇가지에도 바람은 속살거리는 밤을 간들거리게 불어옵니다. 그리고 그 버들가지는 보는 이의 눈을 간지럽게 합니다.     



문득 내가 버들가지이고 당신이 바람이 아닌 것이 아쉽습니다. 또 돌처럼 바위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해요.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돌처럼 바위처럼 굳건할 수 있다면 언제나 그렇게 한결같은 얼굴일수 있게 마음일수 있게.


참으로 돌일 수 바위일 수 있게 되고 싶습니다.

이 신록의 밤에 ─.


어둡습니다. 몹시.

주위는 온통 검정 어둠뿐이며 암흑의 세계입니다.


그 암흑 속에서 출발하고 어둠속으로 돌아가는 생의 의미를 어둠속에서 그 의미를 찾듯 차마 헤어질 수, 차마 잊을 수 없는 당신이지만, 당신 앞을 가로막는 돌멩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어두운 밤을 소리 없이 통곡하면서

언제까지 ─.


I honestly love you.


... 진정 그대를 사랑해 (1976.09)    




매거진의 이전글 미완청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