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가드닝 일기 - 나는 3년 차 가드너다
'비가 오긴 왔었나요?'라고 할 수 있는 역대 가장 짧은 장마였다. 올해의 장마는 길고도 엄청날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 장마가 보란 듯이 끝났다. 그러고는 37, 38도를 기록하는 117년 만의 무시무시한 폭염이 7월 초부터 시작되었다.
비는 오지 않아 땅은 말라가고, 강렬한 태양과 뜨거운 공기 때문에 꽃들은 픽픽 쓰러지고. 웬만하면 마당 식물에 물을 안 준다는 베테랑 정원지기들도 부랴부랴 물 시중을 들고 있으니, 이런 기후가 앞으로 계속된다면, 가드닝이란 취미는 사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마구 솟아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여름 꽃이 하나 둘 "여기에 꽃이 있다고요!"를 외치며 마당에서 피어나고 있으니, 고민은 잠시 뒤로 하고 일단 꽃 감상을 시작해 본다.
먼저 여름꽃의 대명사 에키네시아. 다른 정원지기분들의 SNS 사진을 보니 다들 에키네시아 꽃이 풍성하시던데 우리 집 마당의 에키네시아는 왜 겨우 두세 송이, 많아야 대여섯 송이 정도로 빈약해 보이는지. 그래서 작년의 에키네시아 사진과 비교해 보니 꽃의 양이 절반 정도로 확실히 줄었다.
에키네시아들이 반음지에서 크면서 일조량이 부족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흙의 영양분이 부족한 때문일 수도, 또 올해의 차가웠던 봄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에키네시아를 옮길 햇볕 잘 드는 새로운 자리는 없고, 날씨의 상태는 하늘에 맡겨야 하니, 일단 내년 봄에 비료를 듬뿍 주는 것으로 타협.
그래도 에키네시아는 반음지에서 꽃대 튼튼하게, 폭우와 폭염에도 쓰러지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꽃을 피워내는 최강의 다년생 야생화다. 에키네시아는 원색의 화려하면서도 단단한 꽃잎을 가진 친구들부터, 채도가 낮은 하늘하늘한 꽃잎의 친구 등 종류가 다양하니, 취향에 맞는 친구로 데려와서 꼭 한 번 키워 보길 바란다.
여름을 대표하는 또 다른 야생화로 숙근 플록스가 있다. 이 친구들은 손 안 가고, 쑥쑥 크고, 월동 잘하고, 여름에도 매우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5월 중순에 순지르기 한 번 해주면 7월 초에 꽃대가 두 배가 되는 가드너들의 효녀, 효자다.
플록스 '오키드 옐로'는 형광분홍과 연노랑 색깔 조합의 작은 꽃들을 다글다글 올리는 친구다. 이 친구는 우리 집 플록스 중 유달리 키가 크고 세력이 강한 것이 특징으로, 가능하면 순지르기는 꼭 해주는 것이 좋다.
플록스 '블루 파라다이스'는 선선한 아침에는 신비한 파란색이었다가 낮에는 보라-분홍으로 꽃의 컬러가 쓱 변하는 친구다. 그런데 올해는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 너무 더워서 그런지, 파란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하루 종일 촌스러운 보라-분홍을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플록스 보다 꽃송이를 큼지막하고 탐스럽게 올리고 있어, 마당 어디에서도 눈에 잘 띄는 복고풍 씬스틸러로 활약 중이다.
진한 노란색의 겹프릴 코레옵시스 '얼리 썬라이즈'는 6월 초중순에 1차 개화를 했다. 그 후 시든 꽃을 바로 잘라주니 7월 초에 2차 개화를 다시 시작하면서 또 한 번 달리고 있다. 반면 코레옵시스 '리틀뱅레드'는 이제야 느지막이 첫 개화를 시작했다.
'리틀뱅레드'는 코레옵시스 종류 중 폭 20센티, 높이 30센티, 꽃 한 송이의 크기도 0.5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소형의 코레옵시스다. 이 친구는 꽃의 크기도 작고, 키도 작아 정원에서의 존재감이 크지는 않다. 하지만 고혹적인 와인빛과 진득한 노랑이 조합된 꽃잎이 묘하게 매력적이어서, 나만의 특별한 보물 같은 아이를 키우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는 코레옵시스다.
서양톱풀이 만개한 후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가득 품고서 톱풀 '러브퍼레이드'가 개화를 시작했다. 우리 집 마당에서 2년 차가 넘은 이 친구는, 올해 봄에 유달리 세력을 키우더니 단단하고, 굵고, 키가 큰 줄기를 스무 개는 넘게 올리며 제대로 꽃 풍년을 보여줄 기세다. 톱풀의 꽃말은 '집안의 풍요'다. 손톱보다 작은 하나하나의 꽃이 가득 모여 큼지막한 꽃이 되는데, 톱풀이 가득 피니 정원도, 마음도 꽃말처럼 풍요로워진다.
하얀색의 별 같은 꽃이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는 그릭 오레가노가 만개했다. 이 친구는 꽃을 보기 위해 키운다기보다는, 향기가 무척 좋은 잎을 수확해서 말린 후 요리에 사용하기 위해 키우는 허브 종류다. 하지만 좁쌀만 한 작은 꽃이 모여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피어나면, 여름 정원에 청량감이 시원하게 퍼진다. 단 가느다란 꽃대들이 높이 솟아 흐느적거리면 산만해 보일 수 있어, 지지대로 정돈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작년 여름 장마와 더위에 녹아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캄파놀라가 올해 봄에 새순을 올리더니, 기특하게 꽃까지 피웠다. 그런데 캄파놀라는 한꺼번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한 송이 두 송이씩 띄엄띄엄 피면서 먼저 핀 꽃이 누렇게 시들어 버린다. 문제는 시든 꽃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는 것.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 활짝 핀 꽃과 누렇게 시든 꽃이 함께 잡히면서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올해 처음 2년 만에 꽃을 봤는데 아쉬움이 남는 꽃이다.
작년과 비교해 반타작 정도였던 엔들레스 섬머 수국이었지만 장마가 아주 짧았던 덕분에 7월 중순까지 오래도록 꽃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싱싱한 꽃도 있고,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꽃송이도 있지만, 이제는 꽃을 정리하고 가지를 잘라 내년을 준비해야 할 시기다.
전정의 시기가 더 늦어지면 꽃눈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전에 겨울이 되어버려, 내년에 꽃을 많이 볼 수 없다. 엔들레스 섬머 같은 마크로필라 계열 수국은 비록 당년지에서도 꽃이 피는 수국이긴 하지만 전년지에서 만들어진 꽃눈이 겨울 동안 얼지 않고 월동을 잘 마치면 다음 해 6월에 훨씬 더 많은 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엔들레스 섬머 수국꽃이 시들고 나면, 꽃을 자르는 김에 나무의 모양도 잡아 주고, 햇빛을 못 받아 약하게 자란 안쪽의 얇은 가지도 잘라 주고, 오래되어 활력이 떨어진 묵은 가지도 정리해 주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면 좋다. 우리 집의 엔들레스 섬머 수국은 그동안 덩치가 너무 커져서 작은 마당이 터져 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좀 짧게 쳐버린 다음 작은 크기로 키워볼 계획.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수국 비료주기. 수국은 3월과 6월에만 비료를 주는데, 9월에도 비료를 주면 꽃눈을 만드는 생식 생장을 안 하고 몸집만 쭉쭉 크는 영양 생장을 한다. 그러니 올해의 수국 비료 주기는 이걸로 끝. 내년에도 다시 한번 큰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여름과 가을에 열심히 성장하여 꽃눈을 만들어 보라고, 손주에게 보약을 먹이는 할머니처럼 비료를 준다.
잉글리시 라벤더 꽃을 수확했다. 라벤더의 시원하면서도 풍요로운 향기를 맡으면, 더위에 축 쳐져버린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오감의 샤워를 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수확한 라벤더를 꽃병에서 서서히 말리면 초여름 정원의 생동감 넘치는 기운을 가을과 겨울 동안 집안 구석구석에서 맡고 느낄 수 있다.
가을이 되면 옮길까? 아니야, 장마 기간에 옮겨야지! 안전하게 가을까지 기다리자고. 아니야, 지금 장마 기간에 옮겨도 충분히 괜찮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웃자라거나 비실비실한 꽃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벨렌 슈필 장미가 너무 커졌다. 플라밍고 셀릭스도 올해 부쩍 컸다. 또 다른 숙근 야생화들도 2~3년 차가 되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진 그늘을 예상하지 못하고 화단 중간 부분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하늘바라기, 긴산 꼬리풀, 히솝, 뱀무, 베로니카 로열블루 등등을 대거 자리 이동을 했다.
여름에 꽃들을 옮겼다가 시들시들 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불안했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별 이상 없이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부디 4년 차가 되는 내년에는 이 작은 미니 정원에서 이동수 없이 이제야말로 제대로 자리를 잡아 마당도 안정이 되고 꽃도 풍성해지는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하지만 사실 뽑고, 옮기고, 심고도 가드닝의 재미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내년에도 비슷한 과정을 또다시 반복할 것이다.
이젠 장마가 아니라 길고 긴 극한의 더위와 습기가 기다리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기후가 다 된 것 같은 우리나라의 여름. 그래서 동남아 지역에서 잘 자라는 꽃을 알아보려다, '아 우리나라는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겨울도 있잖아! 그럼 뭘 어째야 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꽃울 키워 보겠다고 작은 마음, 큰 마음먹었던 많은 분들이 떠나가는 여름. 7월과 8월, 꽃들은 죽어 나가고, 정원은 엉망이 되고, 마음은 상처투성이가 된다. 하지만 마당 어딘가에는 여름의 꽃이 피어 있다. 우리들의 마음속 어딘가에도. 그러니 망가지고 헝클어진 정원일지라도 아침 일찍, 그리고 해가 진 후 애정을 한 스푼씩만 넣어주면 꽃은 다시 피어나고 정원은 새롭게 빛날 것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럼 만화의 가드닝 일기, 오늘은 이만.
(2025년 7월 1일~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