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가드닝 일기 - 나는 3년 차 가드너다
장마가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장마보다 더 거칠고 험한 폭우가 며칠 동안 쏟아졌다. 우리 동네는 그 폭우가 상대적으로 좀 약해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지나갔지만, 100년, 200년 기록을 갈아치우며 내렸던 큰 비는 전국 곳곳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여름은 소나기, 무지개 그리고 뭉게구름과 함께하는 몽실몽실한 낭만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극한의 폭우와 극한의 폭염과 같은 재난이 끊이지 않는 두려운 여름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잠시, 무탈해 보이는 나의 이 작은 정원에서 여름의 낭만을 추억하며 한숨을 돌려 본다.
여름을 대표하는 관목의 꽃은 목수국이다. 활짝 피기 전의 싱그럽고 상쾌한 라임빛, 활짝 핀 후의 청량하고 시원한 하얀빛. '빵빠레' 아이스크림 같은 원추형의 하얀 꽃송이가 마당에서 하늘 거리면 어릴 적 여름날의 추억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우리 집 목수국은 모두 세 주가 있다. 두 주는 가을 목수국 꽃을 보기 위해 지난 6월 초에 전정을 했고, 전정을 하지 않은 한 주가 지금 개화해 여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하지만 한여름에 개화하는 목수국 꽃은 폭우와 더위에 시들어 버려, 서서히 분홍빛으로 깨끗하게 물들어 가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개화 시기를 아예 가을로 늦추고자 결심했고, 그래서 지난 초봄에 이어 6월 초에 목수국을 한번 더 전정하게 되었다.
목수국은 전정을 하면 대략 90에서 100일 정도 후에 새로 난 가지에서 꽃이 피기 시작한다. 따라서 6월 초에 전정을 했으니, 9월 중순쯤이면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목수국을 전정하고 대략 두 달이 가까워지고 있는 현재, 전정 한 부위 밑 마디에서 두 개 혹은 세 개의 새로운 가지가 모두 성공적으로 나와 쑥쑥 자라고 있다. 비록 한여름의 목수국 꽃은 거의 포기했지만, 그래도 올해는 난생처음 분홍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가을 목수국 꽃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수국의 전정 상태를 확인한 김에 봄 개화, 아니 6월 초여름 개화를 마치고 6월 하순에 전정한 장미들의 상태도 확인해 보자.
장미는 전정을 하면, 전정한 부위 밑 마디에서 새로운 가지가 자라나 대략 45일 전후로 꽃이 핀다. 6월 20일쯤 전정을 한 후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빨간 새순과 새잎이 무럭무럭 올라오며 어느새 작은 꽃봉도 달려 있다. 이 상태면 7월 말에서 8월 초에 한여름 장미가 소담하게 피어날 것이다.
단 여름의 장미는 뜨거운 햇살과 더위 때문에 크기도 작고 꽃이 빨리 망가진다. 한여름에도 장미꽃을 봤다는 것에 작은 만족과 행복을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 여름에 장미꽃을 보고 다시 또 전정을 하면, 5월 장미꽃의 아름다움에 버금가는 가을 장미꽃을 한번 더 만날 수 있다.
7월 중하순, 우리 집 작은 마당에는 새롭게 피어난 꽃이 거의 없이 개화 기간이 긴 6월 말, 7월 초의 여름 꽃들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생명력 강한 여름 꽃들은 지난 극한의 폭우와 현재의 살인적인 폭염을 모두 견뎌내며 정원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플록스는 신기한 꽃이다. 지난 폭우로 그동안 핀 꽃이 모두 떨어졌지만, 떨어진 꽃 밑에 또 꽃봉오리가 가득 올라오며 다시 회춘하듯이 새로운 꽃이 피어난다. 이렇게 피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면서 가을까지 쭉 피는 꽃이 플록스다. 지난 폭우 때 기온이 좀 내려가니, 플록스 블루 파라다이스는 특유의 파란빛이 돌기 시작하고, 플록스 오키드 옐로도 형광분홍과 노랑 조합의 본래 색을 선명하게 뿜어내고 있다.
천인국 가일라르디아 메사도 꽃이 끝없이 샘솟고 있다. 천인국의 꽃이 시들면 바로바로 잘라 주고 있는데, 그러면 그 밑으로 새순이 올라오면서 꽃이 계속 생긴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새로운 꽃을 유도하기 위해 천인국을 잘라주다 보면, 어느 순간 키가 커버려 비실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단점이다.
톱풀 러브 퍼레이드도 꽃이 더욱 많아졌다. 이 꽃은 귀엽고 폭신한 작은 리본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느낌이다. 줄기의 덩치와 키만 좀 더 줄이면 훨씬 더 사랑해 줄 꽃일 텐데, 꽃 크기에 비해 덩치가 너무 큰 것이 자꾸 눈에 거슬린다.
운남소국은 물을 만났다. 7월 하순의 지금이 최고의 전성기인 듯한 모습. 운남소국은 5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10월 하순까지 거의 반년을 쉬지 않고 꽃을 피워내며 달린다. 매일 피어 있어 오히려 존재감이 떨어지지만, 이런 꽃이 하나 둘 있으면 게으른 정원지기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여름의 꽃 에키네시아도 아직까지 충분히 현역이다. 비록 제일 먼저 핀 꽃은 꽃잎이 후드득 떨어져 잘라 주었지만, 아무리 더워도, 아무리 비가 몰아쳐도 단단한 꽃대를 지지대 삼아 웬만해선 시들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7월 하순의 정원에서 달콤한 것이 당길 때는 알록달록 사탕 같은 에키네시아를 한 번 쳐다보도록 하자.
일년초 안젤로니아도 여름의 정원에서 빠질 수 없다. 대부분의 일년초들이 폭우와 폭염에 슬금슬금 무지개다리를 건너가는 경우가 많지만 안젤로니아만은 멀쩡하다. 오히려 이맘때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이 친구는 꽃의 색깔이 진득하게 고급스럽고, 잎도 하나 상하지 않고 진초록으로 묵직하다. 화분이 하나 둘 슬슬 비어가기 시작하는 한여름의 정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일년초다.
그동안 꼭 키우고 싶었던 루드베키아 하나를 들였다. 가격이 좀 있어서 포트 화분이 큰 대품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한 택배를 확인해 보니 활짝 핀 꽃송이들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작은 모종을 사서 이 정도의 꽃을 보려면 2년은 키워야 한다. 키우는 시간을 돈과 바꾼 셈이다. 고흐의 그림이 떠오르는 이 고혹적인 색감, 그리고 키도 50센티 전후로 우리 집 마당에 딱 적당한 크기다. 대만족.
작년 가을에 어린 모종을 심었던 하늘바라기. 모두 세 종류를 심었는데 한 아이는 겨울을 나지 못했고, 나머지 두 아이는 살아서 꽃이 피긴 했지만 달랑 한 송이씩만 보여주고 있다. 올해는 1년 차니 몸집을 키우는데 만족하기로 하고, 다음 겨울을 한 번 더 보낸 후 2년 차의 여름에는 제대로 꽃이 활짝 피기를 기대해 본다.
올해 좀 늦게 파종 한 백일홍과 메리골드는 꽃 소식이 아직이지만, 8월 초가 되면 본격적으로 개화를 시작하려는지 꽃봉이 여기저기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백일홍은 첫 꽃을 모두 적심을 한 상태로, 적심 한 아래에서부터 새로운 순이 쑥쑥 자라나고 있어 조금 더 풍성하게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마를 피해 최대한 늦게 마당에 심은 만큼, 곰팡이병이 아주 심했던 작년과 비교해 아직까지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몇백 년 만의 기록을 갈아 치운 극한의 호우가 지나갔다. 비에 녹아 버린 꽃들, 쓰러진 꽃들을 정리하며 마당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꽃과 식물은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의외로 이 아이들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다. 이렇게 작은 정원에서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의 뜰에서도 쉽게 상처받고, 쉽게 속상해하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내던진다.
세상을 집어삼킨 폭우가 몰아쳤음에도, 대지와 공기를 달구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마당에 꼿꼿하게 피어 있는 한여름의 꽃들. 오늘 같은 여름에도 꽃들은 속삭인다. 보아요, 우리의 오늘을, 당신의 내일을.
그럼 만화의 가드닝 일기, 오늘은 이만.
(2025년 7월 16일~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