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가드닝 일기 - 나는 3년 차 가드너다
기록적인 폭염에도 불구하고, 올해 여름을 무탈하게 넘기나 싶었지만 8월 중순을 전후해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를 대비해 몇몇 꽃들을 지지대에 묶어주긴 했다. 그러나 꽃봉을 잔뜩 달고 머리가 점점 커지고 있던 (지난 일기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온 기쁨이라고 호들갑을 떤) 하늘바라기 '프리마 발레리나'가 그만 뚝하고 꺾여 버렸다. 가드닝은 이렇다. 예기치 않은 기쁨이 있으면, 예기치 않은 슬픔도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꽃대 몇 개 부러진 것으로 이렇게 엄청난 폭우가 지나갔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그래 잊자. 어차피 올해는 한 송이만 봐도 되었을 꽃이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간사하다. 어쩌다 부러진 줄기가 눈에 들어오면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럴 때는 새로운 꽃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야 한다.
슬금슬금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낌새가 돌자, 또 다른 하늘바라기 '버닝하트'가 꽃봉오리를 쑥쑥 만들고 한송이에서 세 송이, 세 송이에서 다섯 송이 꽃을 피우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 친구는 초화인데도 잎이며 가지며 생김새가 남다르다. 풀도 나무도 아닌 그 중간계의 식물처럼 딴딴한 잎과 가지를 뽐내며 선명한 노란색의 꽃을 피워낸다. 폭염과 폭우의 기후에서도 잎과 줄기가 반듯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 병해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큰 강점이다. 애정을 가지고 키워볼 만한 꽃이다.
가을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매년 8월 중순쯤 한여름에 피어나는 헬레니움은 노랑-갈색 관상화에 짙은 빨간색의 설상화가 특징인 꽃이다. 그러나 매년 사진 속에서만 구경하는 빨간색의 화려한 벨벳 꽃잎은 보기 힘들어 아쉬움이 생긴다. 헬레니움은 의외로 믈을 좋아하는 친구라고 한다. 꽃봉이 생기기 전부터 꽃이 피는 순간까지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충분히 주어야 제대로 된 꽃잎을 볼 수 있다. 지름 1.5센티 정도의 계란빵 같은 작은 꽃이 다글다글 달리는데 꽃 크기가 조금만 더 크면 좋겠지만, 일단 내년에는 꽃잎부터 제대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도 여름이 한창일 때 조금은 빠르게 가을 분위기를 휘익 당겨오고 있으니, 아직까지는 적당히 예뻐해 주는 꽃이다.
지난 폭우에 비록 하늘바라기와 백일홍 몇 개를 잃었지만, 땅이 충분히 물을 먹었는지 몇몇 호스타가 순식간에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웠다. 호스타는 호쾌하고 상쾌한 잎만으로도 구경할 재미가 충분한 식물이다. 그런데 꽃까지 주렁주렁 올리니 금상첨화. 개화기간이 보름 정도로 그다지 길지 않지만, 보라 또는 하얀색의 비교적 큼지막한 꽃을 여름이 가기 전 보너스처럼 선물한다. 마당에 반음지가 있다면 잎의 모양이 다양한 호스타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서 심어 보는 걸 적극 추천드린다.
가을이 조금씩 다가오는 걸 아는지 운남소국이 점점 완전체가 되어가고 있다. 어느새 꽃은 만개. 비록 마당의 남쪽은 아니지만, 한쪽 구석에 잔잔히 안개구름이 내려앉아 있는 모양이다. 늦은 봄부터 가을 끝까지 거의 세 계절을 피어 있고, 꽃 인심도 훌륭한 친구로, 병 없고, 튼튼하고, 어지간한 비바람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정원의 배경이 되어 주면서도 풍성하고 수수한 꽃이 필요한 정원지기들에게, 운남소국은 아무리 추천해도 부족하지 않은 꽃이다.
이제 가을이 코 앞이다. 자리를 이동할 꽃들은 이제부터 조금씩 옮겨서 겨울이 오기 전 땅속에서 뿌리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내년의 마당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름의 더위에 마당일도 거의 쉬었겠다,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8월의 마지막. 슬슬 가을맞이 정원 정리를 시작할 때다.
앞으로 한 달 후면 꽃이 필 공작아스타를 파내서 화분으로 옮겼다. 이 친구는 마당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는 데, 키가 좀 어중간하게 커서 어중간하게 시야를 가린다. 또 순 지르기 한 가지들이 칠렐레 팔렐레 정신없이 자라면서 수형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얀 별 같은 꽃이 가득 매달리면 그 모습이 그렇게나 황홀할 수 없어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눈 찔끔 감고 삽질 몇 번을 하니 쑤욱하고 뿌리가 들려 나왔다.
꽃을 옮길까 말까는 일 년 내내 고민하는 것 같은데, 들어내는 건 이렇게 순식간이다. 그동안의 고민이 조금 허탈해지긴 했지만 뭔가 앓던 이가 빠진 듯한 기분. 마당 라인이 훨씬 깔끔해졌다. 들어낸 공작아스타는 화분으로 옮겨 주었다. 꽃봉을 만들기 직전에 마당 흙에서 파내 화분으로 옮긴 터라, 몸살을 심하게 할 것 같다. 올해는 꽃 보는 것을 거의 포기한다고 해도, 뿌리가 살아 있다면 내년에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아 만개할 수 있길 바라본다.
그릭 오레가노도 마찬가지였다. 이 친구도 쑤욱 뽑아서 화분으로 이동했다. 2년 차인 올해 꽃도 풍성하게 피고 제법 꼿꼿하게 자라고 있지만, 역시 마당의 중간쯤에서 어중간한 키가 문제였다. 더구나 이 친구는 새로운 줄기를 뿌리 근방에서 지속적으로 쑥쑥 뽑아내면서, 사방팔방 정신없이 퍼져 나가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다. 보석 같은 작은 꽃도 소담하게 이쁘고, 잎의 향기도 너무 좋은 녀석이라 퇴출하기엔 아까운 친구다. 월동이 되는 허브들은 화분에서도 잘 산다고 하니 이렇게 쭈욱 화분에 가두어서 키워봐야겠다.
장마 봄해 앞에서 지난 몇 년 자리 잡으며 봄부터 여름까지 피고 지는 숙근 제라늄 '버시컬러'도 화분으로 이동했다. 이 녀석은 딱히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었지만, 이 자리를 탐내고 있던 '베로니카 로열블루'에게 햇빛을 양보하기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마침 숙근 제라늄 버시컬러는 옆옆의 자리에서 또 한 개체가 잘 자라고 있어, 마음 편히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자리라면 베로니카 로열블루도, 내년 봄부터는 웃자라지 않고 청량한 파란색 꽃을 꼿꼿하고 풍성하게 피울 것이다.
2년 차가 되어서야 첫 꽃대를 올리고 있는 스카비오사 파마 블루다. 아니 어쩌면 토종 솔체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꽃이 피어봐야 이 녀석의 진짜 정체를 확일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옆자리의 토종 솔체가 확실한 녀석은 아직 꽃대도 안 올라온 상황. 앞으로 9월 한 달 열심히 성장하면, 10월부터 11월 중순까지 한 달 반 정도는 하늘거리는 파란색의 쿠션 같은 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추명국은 일찌감치 꽃대를 올리고 동글동글 꽃봉을 만들고 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이 녀석은 꽃봉 상태로 엄청나게 오래 머문다. 당장 내일이라도 필 것 같지만 아직 멀었다. 천천히 가을을 기다리며 추명국과 나의 각자의 서로 다른 시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 꽃을 빨리 보고 싶은 조급함을 버리고, 오늘을 보내는 행복한 방법이다.
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기록하고 있는 엑셀 시트가 있다. 그 시트에는 우리 집 마당 140여 종의 꽃 리스트가 있는데 벌써 가을꽃을 제외한 90% 정도에 날짜가 매겨졌다. 이제 개화 날자를 기록할 꽃이 얼마 안 남았다.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솔체와 추명국의 꽃봉과 함께, 올해의 가드닝 마지막 시즌이 시작되고 있다.
작년에는 추석에도 많이 더웠다. 여름은 계속 길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지구의 시계는 돌아간다. 길고 길었던 7월과 8월도 끝. 이제 9월이면 다시 꽃을 심을 시간이다. 자, 전국의 정원지기 여러분들 지난여름을 툴툴 털어내고 우리 함께 꽃을 심어 볼까요?
그럼 만화의 가드닝 일기 오늘은 이만.
(2025년 8월 16일~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