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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Nov 09. 2023

바이올렛

난 도망가지 않아 네가 가면을 벗어도

점점 걷기가 힘들어졌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이 점점 커져서 몽글몽글한 물주머니가 되었다. 옐로는 계곡 바위에 바이올렛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엄지손톱만 한 물집이 보였다. 옐로가 발을 들고 살펴보자 바이올렛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스노우가 갑자기 혀를 쑥 내밀어 상처를 핥았다.

“으.”

옐로가 신음소리를 내니

“아야야! 어떡해!”

바이올렛이 펄쩍 뛰면서 비명을 질렀다.    

“터뜨려야겠어.”

옐로가 손톱으로 물집을 살짝 찢었다. 물집에서 맑은 고름이 흘러나왔다. 옐로는 입을 앙다물고 고름을 짜냈다. 콧등이 시큰하고 눈이 빨개지고 눈물이 맺혔다. 바이올렛은 엉엉 울면서 양팔을 모으고 얼굴을 묻었다. 옐로는 발뒤꿈치로 엉금엉금 걸어가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쓰라림이 약간 사그라졌다. 계곡의 바위들은 한낮의 햇볕을 받아 기분 좋게 따뜻해져 있었다. 옐로는 바위 위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바이올렛이 너덜거리는 원피스 밑단을 뜯어내 물에 깨끗이 빨아 바위에 널고 옐로의 발바닥 앞에 엎드려 상처를 입으로 후후 불었다.


바이올렛을 업고 산을 내려오느라 피곤했던 옐로는 깜박 잠이 들었다. 깨보니 바이올렛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옐로가 몸을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자기 구두를 벗어 옐로에게 내밀었다.

“너한테 맞을까?”

“내 신발이 편해.”

옐로는 구두를 다시 신겨 주었다.

“너무 낡았어. 바닥에 구멍 날 거 같아.”

바이올렛이 옐로의 신발을 보며 울먹였다.  

“아직 괜찮아.”

바이올렛이 빨아 널었던 원피스 밑단을 가져와 옐로의 상처를 감쌌다. 그 위에 바이올렛의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미안해. 나 때매. 아프지.

“이제 안 아파.”

옐로는 신발을 신고 발을 두어 번 굴러보았다. 아까보다는 나았다. 

"가자."

옐로는 바이올렛을 업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옐로.”

바이올렛이 등 뒤에서 불렀다.

“응.”

“산에 오기 전에 어디 있었어?”

“병원에.”

“어디 아팠어?”

“아니.”

“근데 왜 병원에 갔어?”

옐로가 말없이 걷다가 잠시 후 대답했다.

“아빠 엄마가 보냈어. 정신병원에.”

“왜?”

“아빠 엄마는 내 얼굴이 이상하다고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어. 난 방에서 혼자 책만 읽었어. 아빠가 가져다준 책이 방에 산더미처럼 쌓였어. 책 속의 친구들은 재미있지만 지루할 때도 있었어.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나가서 돌아다녔어. 들키면 아빠에게 매를 맞았지만 방에만 있으면 너무 답답했어. 어느 날 모두 외출했을 때 집안을 돌아다니다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었어. 그런데 엄마가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왔다가 잠든 나를 발견한 거야. 엄마 친구들은 나를 보고 경악한 얼굴로 비명을 질러댔어. 나도 너무 놀라서 마주대고 소리를 질렀지. 엄마는 골프채를 가지고 와서 날 마구 때리면서 방으로 몰아넣었어. 그 사이 엄마 친구들은 다 도망가 버렸고. 그날 저녁 아빠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어. 엄마 친구네 집안이랑 약혼한 이모가 나 때문에 결혼을 못하게 됐대. 엄마는 어쩌다 저런 괴물이 자기한테 태어났냐며 울부짖었어. 나는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서 차라리 죽고 싶었어. 그날부터 아빠 엄마가 방문에 자물쇠를 채워서 완전히 갇혀 지냈어. 어느 날 엄마가 손거울과 면도칼을 은쟁반에 담아서 갖다 주는 거야. 이게 뭐예요? 물었어. 엄마는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나갔어. 나는 곰곰이 생각했지. 엄마가 왜 이걸 주고 갔을까?”

옐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왜 그러신 거야?”

바이올렛이 물었다.

“침대에 앉아 거울을 들고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어. 내 얼굴에 주렁주렁 달린 살덩어리들을 자르라고 칼을 주고 간 걸까? 혹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 보일까? 그러면 엄마가 동생에게 하듯이 쓰다듬고 안아줄까?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 주고 예쁜 옷을 입혀줄까? 아빠가 친구들에게 나를 보여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을까? 그런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았어.”

“혹은 병원에 가서 떼 달라고 해야지!”

바이올렛이 소리쳤다.

“면도칼로 작은 혹을 하나 잘랐어. 피가 철철 흘렀고 너무 아파서 어질어질했어. 이불을 꽉 물고 다른 들도 손에 잡히는 대로 막 잘랐어. 기분이 이상했어. 아빠 엄마가 나를 칭찬하고 나를 쓰다듬고 나를 안아주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내가 보였어.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겠고 귀가 먹먹하고 팔다리에 힘이 없고 오줌이 흘러나왔어.”

“그만 들을래.”

바이올렛이 귀를 막았다.

"내가 미친 짓을 한다고... 아빠 엄마가 나를 정신병원에 보냈어."

옐로는 바이올렛에게 거기까지만 말했다.     

    

옐로는 혹을 자르고 기절했다. 깨어 보니 코와 입만 빼고 얼굴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이 부어서 소리도 낼 수 없고 손과 발은 침대 모서리에 묶여 있었다. 아빠 엄마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사람들이 우당탕 계단을 올라 옐로의 방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옐로를 침대에서 끌어내 이상한 옷을 입혔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옐로는 자기가 미라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관속에 갇혀 땅에 묻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들이 옐로를 바퀴 달린 침대에 묶고 끌고 가서 구급차에 실었다. 간호사가 빨대로 물을 먹이 붕대를 갈아주었다. 그녀는 붕대를 풀고 옐로의 얼굴에 약을 바를 때마다 슬픈 눈으로 옐로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묶인 채 자고 먹고 치료를 받았다. 열이 펄펄 올라 까무러치기도 했다. 아주 오랫동안 달렸다. 이틀? 삼일? 일주일? 옐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어느 날 옐로는 차에서 끌려나가 다른 침대에 묶였다. 옐로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인사도 없이 떠났다. 간호사가 문을 나서다 잠시 멈춰 섰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병원 사람들은 옐로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 붕대를 갈아주지도 주사를 놔주지도 않았다. 상처에 구더기가 생겨 보글거리고 썩은 내에 숨이 막혔다. 옐로는 곧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죽고 싶었다.


옐로는 벌목 후 남은 그루터기가 군데군데 있고 색색의 들꽃이 피어 있는 풀밭에서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그루터기에 바이올렛을 내려주고 옐로도 앉았다. 신발을 벗어 발바닥을 살펴보았다. 바이올렛이 감싸준 천에 피가 배어 나왔다. 불에 달군 동전 같이 동그랗고 붉은 생살에서 피가 흘렀다.

"병원에서는 잘해줬어?"

바이올렛이 물었다.

"으응... 잘해줬어."


어느 날 갑자기 병원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해졌다. 썩은 붕대를 풀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새 붕대로 갈아 주었다. 새 옷을 입히고 시트도 깨끗한 것으로 깔아 주었다. 잠시 후 좋은 향기가 났다. 고상한 말투를 쓰는 사람들과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옐로의 침대로 왔다. 옐로는 자는 척하면서 실눈을 뜨고 사람들을 쳐다봤다. 의사가 말했다. 죽어가는 아이를 시장 쓰레기통 옆에서 발견해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살려냈다고. 한 여자가 탄식하며 옐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달콤한 향기. 엄마 생각이 났다. 손을 내밀었더니 여자가 옐로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옆 침대 할머니가 '가엾은 것. 후원자들에게 찍혔으니 넌 이제 죽지도 못하고 더 살아야 돼.'라면서 낄낄 웃었다. 옐로가 잘 있나 보러 후원자들이 가끔 찾아왔다. 병원 사람들은 옐로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치료를 잘 받고 상처가 아물자 붕대를 풀었다. 아무도 거울을 보여 주지 않았다. 옐로가 만져 보니 피부가 온통 울퉁불퉁했다. 사람들의 표정과 눈을 보면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옐로와 마주치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잠시 얼어붙었다가 얼굴을 돌리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옐로는 자기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고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거울이나 유리를 피해 다니다가 어느 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았다. 불그죽죽하고 울퉁불퉁한 얼굴이 보였다. 옛날 얼굴이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얼굴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옐로는 다시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병원에 있으면서 옐로는 계속 생각했다. 엄마가 준 손거울과 면도칼에 대해서. 점심으로 나온 감자를 잘라 입에 넣다가 문득 깨달았다. 니 얼굴을 봐. 그리고 죽어. 엄마는 손거울과 면도칼로 그렇게 말한 거였다. 면도칼로 목이나 손목을 그었어야 했다.


"가면도 병원에서 줬어?"

바이올렛이 색색의 들꽃을 잔뜩 따와서 옐로의 윗옷 주머니에 꽂아주며 물었다.

“옆 침대 할머니가 줬어. 젊을 때 연극배우였는데 이걸 쓰고 말괄량이 소녀 역할을 했대.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었다고 소중한 가면이라고 했어. 내게 씌워주고 병실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불러모았어. 환자들과 병원 사람들이 몰려와서 잘 어울린다고 가면을 쓰니 무섭지 않다고 했어. 친구가 되자고 내 손을 잡는 사람도 있었어. 할머니는 머리를 땋아 주면서 가면을 벗지 말라고 했어. 가면 벗으면 사람들이 다 도망갈 거라고.”

“난 도망가지 않아. 네가 가면을 벗어도.”

바이올렛이 말했다.

“도망가지 않아. 절대로.”

바이올렛이 또 힘주어 말했다.

"고마워."

옐로는 윗옷의 밑단을 뜯어내 발을 한번 더 감싸고 신발을 신었다. 바이올렛을 업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스노우가 두 개의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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