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장노아 Noah Jang
Nov 29. 2023
옐로는 그들을 놓칠세라 얼른 뒤따라 달렸다. 바이올렛이 놀라 잠에서 깼다. 물어보니 아빠는 빡빡 대머리고 남동생은 없다고 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진 옐로는 비틀거리며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았다. 바이올렛의 가족이 아니라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생각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옐로, 어디 아파? 목이 빨개졌어."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말했다.
"아냐."
"내려줘. 여기부턴 걸어갈래."
"늦어 그럼. 어두워질 거야."
"아, 그렇구나."
바이올렛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옐로는 걸음에 속도를 냈다. 숲을 벗어나니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스노우가 망설임 없이 왼쪽 길로 들어섰다. 옐로도 따라갔다. 구불구불 도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붕괴된 도로를 뚫고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나 곳곳에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도로 상태는 갈수록 험난했다. 반으로 접혀 삼각형 지붕 모양으로 솟아오른 도로 앞에서 옐로가 걸음을 멈췄다. 도로 양옆의 땅은 거대한 배처럼 길고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를 오르든지 싱크홀을 멀리 돌아가야 했다. 스노우가 신나게 달려 도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옛날 대지진 때 이렇게 됐나 봐."
바이올렛이 말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다. 옐로는 조금 전에 지나쳤던 무너진 건물 쪽으로 되돌아갔다. 녹슬고 구겨진 커다란 철판이 돌무더기에 묻혀 있었다. 옐로가 흙먼지를 털어내며 판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다.
"페... 루..."
"여기 페루야?"
바이올렛이 놀라 소리쳤다.
"설마, 색깔 이름일 거야."
옐로가 웃으며 말했다.
"순간이동한 줄 깜짝 놀랐네."
바이올렛이 깔깔 웃었다.
건물 잔해 속에는 벽과 천장이 무너지면서 생긴 빈 공간이 여럿 있었다. 옐로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은신처 하나를 골랐다. 스노우가 어디선가 헐어빠진 벨벳 천조각을 끌고 왔다. 옐로가 열심히 털었지만 먼지는 한없이 나왔다. 이불로는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옐로는 은신처 입구에 천을 두르고 돌로 고정시켜 커튼을 만들었다. 제법 아늑했다. 옐로와 바이올렛은 숲에서 싸 온 으름 열매를 먹고 스노우에게는 하나 남은 노란 망고를 주었다.
옐로는 잠결에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놀라 일어났다. 날이 밝았고 바이올렛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밖으로 나가 보았지만 아기는 없었다. 꿈을 꾼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스노우가 둘둘 말린 초록색 밧줄 뭉치를 물고 와서 은신처 앞에 놓았다.
"잘했어."
옐로는 스노우를 쓰다듬어 주고 뭐라도 쓸만한 게 있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물의 흔적들로 식당이 딸린 주유소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삭아 없어졌고 남은 것은 플라스틱이나 유리나 철로 만든 물건들이었다. 옐로는 플라스틱 주방용품 더미에서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린 플라스틱 널빤지 세 장을 발견했다. 스노우가 가져온 밧줄을 이용해서 바이올렛을 태울 썰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옐로가 널빤지를 감싸기 위해 커튼을 걷자 바이올렛이 잠에서 깼다.
"옐로, 울었어?"
바이올렛이 물었다.
"아니."
"누가 울었지?"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들었는데, 스노우가 낸 소리였나 봐."
옐로가 말했다.
바이올렛은 스노우 품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썰매를 만드는 옐로를 바라보았다.
"배고파."
바이올렛이 말했다.
"조금만 참아."
"근데, 페루는 무슨 색이야?"
"음... 흙탕물에 주황색 물감을 푼 색."
옐로가 손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저기 저런 색?"
바이올렛이 저만치 앞쪽에 있는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돌 사이에 작은 페루 색 털뭉치가 끼어 있었다. 동물의 꼬리 같기도 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바람에 날리는 건지 살짝 움직였다. 옐로가 가까이 다가갔다.
"뭐야?"
바이올렛이 호기심에 까치발을 하고 물었다.
"고양이."
옐로가 대답했다.
고양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옐로가 다가와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굴리며 꿈벅거렸다. 얼마나 굶었는지 가죽만 남아 갈빗대가 드러났고 배가 쑥 들어가 개미허리 같았다. 뒷다리는 돌 틈에 끼어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앞발의 밭톱은 돌 표면을 긁어대느라 전부 빠진 상태였다. 돌무더기 위를 뛰어다니다 돌이 무너져 다리가 끼인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울었구나."
옐로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옐로는 아주 어릴 적에 막내 이모가 준 봉봉이라는 이름의 인형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보송보송한 털을 가진 갈색 몰티즈였는데 세월이 갈수록 털이 빠지고 쿠션이 꺼지고 꾀죄죄하게 말라비틀어져 갔다. 옐로는 인형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품에 꼭 안고 자던 봉봉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는 연을 끊고 지내는 한심한 이모가 자꾸 떠올라 꼴 보기 싫어 태워 버렸다고 했다. 비쩍 말라 죽어가는 고양이의 모습이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늙은 봉봉이를 닮아 있었다.
바이올렛과 스노우가 가까이 왔다. 스노우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냄새를 한번 쓱 맡고는 무관심했다. 옐로는 벨벳 천을 가져와 여러 겹으로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감쌌다. 고양이가 목구멍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틈이 생기면 얼른 빼내."
옐로가 돌을 붙잡고 말했다.
"알았어!"
바이올렛이 갈고리 손을 꽉 쥐었다.
옐로가 있는 힘껏 돌을 밀어 올렸다. 스노우가 바이올렛을 밀치고 잽싸게 벨벳 천을 물어 끌어냈다.
"얘 다리가 이상해."
바이올렛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고양이는 뒷다리에 정교한 금속 의족을 달고 있었다. 군데군데 찌그러지고 나사가 헐거워지긴 했지만 고장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좋은 주인이었나 봐."
옐로가 말했다.
"어떻게 여기 왔지?"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했다.
옐로가 고양이를 벨벳에 감싸 안으려 하자 놀랍게도 고양이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네 다리가 힘없이 대자로 벌어져 주저앉고 앞으로 옆으로 고꾸라지면서도 계속 일어나 어딘가로 가려고 애쎴다. 옐로와 바이올렛은 가만히 뒤를 따랐다. 죽으러 가든지 누굴 찾으러 가든지 원하는 대로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죽을까?"
바이올렛이 소곤거렸다.
"모르겠어."
"죽기 전에 이름 지어주자."
"응."
"페루 색이니까, 페루라고 해."
바이올렛이 말했다.
페루의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옐로와 바이올렛이 밤을 보낸 곳처럼 돌 사이에 생긴 은신처 같은 공간이었다. 앞에는 오래전에 불을 피웠던 흔적과 갖가지 종류의 빈 통조림이 잔뜩 있었다. 페루가 은신처 안에 놓여 있는 파란색 방수포 위에 올라가더니 푹 쓰러졌다. 옐로가 얼른 달려가 안아 올렸다. 페루가 힘을 다해 애옹애옹 아기처럼 울었다.
"뭐 있어?"
바이올렛이 은신처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
옐로가 답했다.
스노우가 천천히 은신처로 걸어가 방수포 자락을 입에 물고 끌어당겼다. 방수포가 거의 끌려 나왔을 때, 사람의 해골이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페루가 찾아온 주인의 해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