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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Dec 06. 2023

스노우

오염된 애들이잖아!

옐로는 솟아오른 도로 앞에 섰다. 바이올렛과 페루까지 데리고 안전하게 올라갔다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멀리 싱크홀을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플라스틱 썰매에 바이올렛을 태우고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 시험적으로 끌어보니 소리가 요란하긴 했지만 업는 것보다는 손도 자유롭고 힘도 덜 들었다. 옐로가 지치면 스노우의 몸에 밧줄을 묶어 끌게 할 수도 있었다. 바이올렛은 흔들흔들 자꾸 넘어지면서도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옐로는 벨벳 천으로 만든 포대기에 페루를 싸서 가슴에 동여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페루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옐로는 출발했지만 스노우는 빈 통조림 더미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멀쩡한 복숭아 통조림 하나를 찾아낸 스노우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잘했어, 스노우."

옐로는 통조림 뚜껑을 열어 바이올렛과 스노우 입에 하나씩 넣어주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냄새를 맡은 페루가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살짝 움직였다. 콩알만큼 작게 잘라 입에 넣어주니 잘 받아먹었다. 어쩌면 페루가 살 수도 있겠다고 옐로는 생각했다.  


'레인보우 5km'라고 적힌 이정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자욱한 회색 안개 덩어리가 보였다.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니 안개가 옅어지며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 뒤편에 거대한 공장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수많은 굴뚝에서 잿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허름한 작업복에 챙이 긴 모자를 쓴 남자가 고물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뿌연 얼굴에 검은색 눈동자만 반짝였다. 남자가 자전거 앞에 달린 바구니에서 뭔가를 꺼내 옐로 쪽으로 휙 던지고 지나갔다. 옐로는 재빨리 몸을 숙여 바이올렛을 감싸 안았다. 스노우가 '컹!' 짖더니 뛰어올라 남자가 던진 물건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어른 손바닥만 한 빵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 초입에 앞다리를 들고 몸을 세운 거대한 말 조각상이 있었다. 이마에 커다란 무지개색 뿔이 하나 달려 있고 양쪽 어깨에는 날개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온통 금이 가고 갈라져 있었다. 옐로는 조각상 밑에 썰매를 버리고 바이올렛을 등에 업었다. 잡초가 무성한 들판을 한참이나 지나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복잡하고 좁은 거리에 접어들었다. 어두워졌는데도 불을 밝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간간이 보이는 가로등은 꺼져 있거나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었다.


옐로는 임대 광고 팻말이 세워진 불 꺼진 이층 집을 발견했다. 집 근처 가로등도 꺼져 있어 주변이 컴컴했다. 한 바퀴 돌면서 확인하니 모든 문과 창문이 잠겨 있었다. 운 좋게도 반지하 창고의 작은 창문은 닫혀 있기만 했다. 옐로는 주변을 경계하며 창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서 창고 문을 열어 모두 들여보냈다. 빈 창고 구석에 이삿짐 상자가 몇 개 있고 바닥에 잡동사니가 굴러다녔다. 스노우가 상자 위에 놓인 손전등을 찾아 옐로에게 가져왔다. 상자 겉면에 자선단체로 보이는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통조림이 들어 있으면 좋겠어.”

바이올렛이 꼬르륵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먹을 것은 없었다. 대부분 상자에 아기용품과 장난감, 동화책이 들어 있었다. 아기포대기와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책가방도 있었다. 상자 하나에는 깨끗하게 세탁된 어린이 옷과 내의, 양말이 가득했다. 옐로는 소꿉놀이용 찻주전자를 들고나가 뒷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담아왔다. 다행히 페루도 물을 잘 받아 먹였다.

“원피스! 내가 좋아하는 레이스!"

바이올렛이 옷들을 꺼내 구경하며 재잘거렸다.

옐로와 바이올렛은 누더기를 벗고 마음에 드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짙은 스모그 탓에 어두침침했다. 하늘의 해도 뿌옇게 보였다. 옐로는 아기포대기로 페루를 안고 바이올렛을 업고 거리로 나왔다. 작업복을 입은 어른들이 공장 쪽으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옐로는 스노우를 따라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옐로 또래 아이들 다섯 명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쳐갔다. 여자애 하나가 자꾸 옐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다른 아이의 자전거와 충돌해 쓰러졌다. 자전거 다섯 대가 엉켜 다들 넘어지고 난리였다. 옐로는 걸음을 재촉했다. 자전거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옐로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옐로는 공원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페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옐로가 공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어가자 자전거들은 울타리를 끼고 공원 출입구를 향해 달렸다. 스노우가 자전거들을 쫓아가며 짖어댔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엄마와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청년 둘이 공원에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의 추격전을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았다. 옐로가 잔디밭에 떨어져 있던 고무인형을 밟고 넘어졌다. 바이올렛도 나동그라졌다. 아이들이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우르르 달려들었다.

“왜 죽은 오커의 옷을 입고 있는 거야?”

말라깽이가 옐로의 티셔츠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건 오커 여동생 원피스 아냐?”

아이들이 바이올렛을 가리켰다.

스노우가 바이올렛 앞을 막아서며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아이들이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아까 옐로를 쳐다보다 넘어진 키 크고 마른 여자애가 앞으로 나섰다. 바지의 무릎 부분에 피가 배어 있었다. 여자애는 자전거 헬멧을 벗어 스노우를 향해 힘껏 내둘렀다.

"잘한다! 말라깽이! 해치워 버려!"

아이들이 소리쳤다.

“거지야? 도둑이야? 가면은 왜 쓰고 있어?”

“보면 몰라? 오염된 애들이잖아!”

“저 웃는 가면 소름 끼쳐!”

"포대기에 든 건 뭐야?"

"죽은 고양이 같은데?"

“쟤는 다리가 없어!”

“옷 벗기고 도시 밖으로 쫓아내자!”

아이들이 떠들어댔다.

옐로가 바이올렛을 등에 업자 말라깽이가 돌을 던졌다. 돌은 옐로의 가면에 맞고 떨어졌다.

“내 친구 옷 당장 벗어! 멀대랑 뚱보 뭐 해?”

말라깽이가 악을 썼다.

“가면 먼저 벗기자!”

볼이 빨갛고 뚱뚱한 남자애가 어깨가 솟은 멀대 같은 남자애의 팔을 잡아끌며 외쳤다. 뚱보와 멀대가 달려들었지만 옐로는 이리저리 몸을 틀어 빠져나갔다. 뚱보와 멀대는 자기들끼리 부딪쳐 넘어졌다.

“안경잡이! 주근깨! 쟤 원피스 벗겨!”

말라깽이가 체격이 왜소한 안경 쓴 남자애와 주근깨 투성이 단발머리 여자애에게 소리쳤다. 둘이 바이올렛에게 달려들었다. 스노우가 바이올렛의 머리채를 잡은 안경잡이의 팔을 물었다. 안경잡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지만 스노우는 팔을 물고 늘어졌다. 주근깨가 스노우의 옆구리를 발로 마구 걷어찼다. 말라깽이는 헬멧으로 스노우의 머리를 계속해서 내리쳤다. 바이올렛이 엉엉 울었다. 옐로가 뚱보와 멀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 재빨리 바이올렛을 업고 달렸다. 스노우도 안경잡이의 팔을 놓고 뒤따랐다. 아이들은 안경잡이를 둘러싸고 물린 자국을 살폈다. 이빨 자국에 핏기가 살짝 어린 정도였다.

“세게 물진 않았네.”

“겁쟁이 개야.”

“그래도 아프단 말야.”

안경잡이가 상처를 손으로 가리고 울먹거렸다.

“복수하러 가자!”

“복수하자!”

아이들이 소리치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공원을 빠져나온 옐로는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온몸이 땀에 젖고 가면 속이 열기로 후끈거렸다. 백여 미터 앞에 파란색 가림막에 싸인 건물이 보였다. 공사가 중단되고 오래 방치되었는지 가림막이 군데군데 찢어지고 철골구조물이 온통 녹슬어 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철근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2층과 3층 경계에 두꺼운 작업용 널빤지들이 걸쳐져 있었다. 옐로는 철근을 붙잡고 힘껏 흔들어 보았다. 구조물은 바닥 시멘트에 깊이 박혀 튼튼했다.

“애들이 왔어.”

바이올렛이 겁에 질려 속삭였다.

말라깽이를 선두로 자전거 다섯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아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다. 옐로는 철골구조물을 타고 널빤지 위로 올라갔다. 안전모와 더러운 목장갑, 찌그러진 안전화 한 짝이 뒹굴고 있었다. 가장자리가 조금 삭긴 했지만 널빤지는 탄탄했다.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

옐로가 바이올렛을 내려주었다. 페루가 쉴 수 있게 포대기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따라 올라오지 못하는 스노우는 위를 올려다보며 낑낑거렸다.

“혼자 있어도 괜찮을까?”

바이올렛이 울면서 물었다.

“개를 해치진 않겠지.”

옐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전거에서 내린 아이들이 건물 아래로 몰려왔다. 아무도 철골을 타고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래서 주먹을 휘두르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돌을 던졌다. 뚱보가 커다란 돌멩이를 옐로를 향해 던졌다. 철근을 맞고 튕겨나간 돌이 다시 뚱보에게 떨어졌다. 지켜보던 아이들이 와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마에 떨어진 돌에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아이들이 더 요란하게 웃어댔다. 뚱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옐로를 노려보던 뚱보는 스노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노우는 앞발을 철근에 올리고 서서 위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뚱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공사장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창처럼 뾰족하게 절단된 철근 하나를 들고 뛰어왔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뚱보를 지켜보았다. 살금살금 스노우 뒤로 다가간 뚱보가 철근을 높이 쳐들었다.

“안 돼!”

옐로가 외쳤다.

뚱보가 스노우의 목에 철근을 꽂았다. 철근이 목을 뚫고 턱밑으로 나왔다. 스노우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뚱보를 돌아보았다. 뚱보가 철근을 뺐다. 스노우의 입과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빨간 목도리를 두른 것처럼 하얀 털이 피에 젖었다. 뚱보가 옆구리에 철근을 또 찔러 넣었다. 스노우가 이리저리 부딪치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푹 고꾸라졌다. 아이들은 스노우의 피를 뒤집어쓴 채 얼어붙었다.


옐로가 철골을 타고 내려왔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자전거에 올라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뚱보는 얼빠진 표정으로 옐로와 스노우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뚱보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번졌다. 혀를 길게 빼문 스노우는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옐로는 피가 솟는 목과 옆구리의 구멍을 양손으로 꾹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꾸룩꾸룩 한없이 흘러나왔다. 경련이 차츰 잦아들었다. 스노우의 다리가 쭉 펴졌다가 오그라들며 마침내 숨이 멎었다. 뚱보는 젖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전거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비틀비틀 자전거를 타고 도망쳤다.

 

바이올렛이 옐로와 스노우를 애타게 불렀다.

"옐로! 스노우! 무슨 일이야?"

바이올렛은 바닥에 엎드려 조심조심 널빤지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옐로가 스노우를 안고 피웅덩이에 있었다.

"왜 피가 났어? 나 내려줘!"

바이올렛이 앙 울음을 터뜨렸다.

"기다려! 내가 갈게!"

옐로는 스노우의 눈을 감겨주고 일어났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스노우의 얼굴은 잠에 깊이 빠진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철골을 타고 올라가던 옐로는 손과 신발에 묻은 피 때문에 미끄러져 떨어졌다. 피웅덩이에 대자로 떨어진 옐로의 온몸이 피에 잠겼다.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스노우의 얼굴이 있었다. 옐로는 예전 어느 날처럼 이대로 누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옐로는 손과 신발의 피를 흙바닥에 문질러 닦고 위로 올라갔다. 바이올렛이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스노우가 죽었어."

옐로가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바이올렛이 소리쳤다.

"스노우는 열한 살이야! 벌써 죽지 않아!"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갔어."

옐로가 바이올렛을 꼭 안았다.

"안 돼! 나랑 같이 있어야 해!"

바이올렛이 울부짖으며 옐로를 밀치고 순식간에 뛰어내렸다. 옐로가 간신히 바이올렛의 원피스 자락을 잡아 끌어 올렸다.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던 바이올렛이 정신을 잃고 옐로의 품 안에 쓰러졌다.


경찰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자전거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바이올렛과 페루를 아기포대기로 단단히 동이고 철골구조물에서 내려온 옐로는 스노우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스노우, 안녕."

옐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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