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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Dec 13. 2023

시네러스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해?

붉은 피를 뒤집어쓴 옐로는 달리고 또 달렸다. 스노우의 피에서 비릿하기도 향기롭기도 한 묘한 냄새가 났다. 사람들은 낯선 야생동물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흠칫 놀라며 길을 비켜주었다. 언제 저 눈빛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옐로는 죽을 때까지 달릴 수 있었지만, 페루와 바이올렛이 힘들 것 같아 멈춰 섰다.


사람들을 피해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트램 선로가 어지러이 교차하는 번화가 한가운데였다. 저만치 경찰 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보였다. 옐로는 막 출발한 트램을 따라 달리다 끝칸의 난간을 붙잡고 올라탔다. 끝칸 바깥의 좁은 공간은 담배를 피우거나 바람을 쐬는 용도로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요금이 없거나 트램을 놓칠 뻔한 승객을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옐로는 문을 막고 웅크리고 앉았다. 트램의 소음과 진동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사람들이 스노우를 어떻게 했을까?"

바이올렛이 슬픈 얼굴로 물었다.

"잘 묻어 줬을 거야."

"정말?"

"응."

"나도 다리가 길었으면 좋겠어."

바이올렛이 말했다.

"왜?"

"넘어지지 않고 빨리 달릴 수 있으니까."

"다리가 길어도 넘어져."

옐로가 말했다.


깜박 졸다가 눈을 떴다. 정차한 역은 조명과 간판이 총천연색으로 번쩍거리는 유흥가였다. 취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우르르 몰려와 옐로가 있는 트램 난간 위로 올라오거나 매달렸다. 파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깡마른 남자가 옐로를 발로 세게 밀었다. 옐로가 버티자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금발 여자가 합세해 하이힐 끝으로 꾹꾹 찔러댔다. 옐로는 그들에 떠밀려 트램에서 떨어졌다. 사방에서 여러 악기가 뒤섞인 연주와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간판만으로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가게들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특이한 복장에 요란한 분장을 한 호객꾼과 여자들이 손님을 꼬드겨 가게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직 낮인데도 사람들은 취해 있거나 싸우거나 웃거나 노래하거나 춤을 추었다. 옐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데, 옐로."

바이올렛이 불렀다.

"우리 오염됐어? 애들이 그랬잖아."

"그런가 봐."

"왜 우릴 괴롭히는 거야?"

"없어지길 바라니까."

옐로가 답했다.

"왜?"

"책에서 봤는데, 옛날 대지진 때 원자력 발전소가 다 폭발하고 방사능이 세상에 퍼졌대.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다르게 태어난대. 방사능에 오염된 아빠 엄마가 오염된 아기를 낳는 거래. 그래서 사람들은 오염된 사람과는 결혼도 안 하고 친구 되는 것도 싫어한대."

"우리 집에 사는 사람들은 아빠 엄마 빼고 다 그래. 청소 언니는 눈썹이랑 머리카락이 없고 코하고 귀에 구멍만 있는데, 도자기 인형처럼 매끌매끌 예뻐. 언니는 일이 끝나면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입학하면 엄마가 장학금을 준다고 했거든. 요리 이모는 피카소가 그린 멋있는 초상화 같은 눈코입을 가졌어. 이모가 만든 음식은 뭐든지 최고로 맛있어. 정원사 삼촌은 손가락을 일곱 개나 가졌어. 두 손을 합치면 열네 개야. 매일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장갑을 끼고 나무들을 예쁘게 만들어. 난 삼촌을 요술장갑이라고 불러. 작년 내 생일에 나랑 닮은 나무가 정원에 생겨서 모두 깜짝 놀랐어. 운전하는 삼촌은 말을 못 하지만 다 알 수 있어. 백만 가지 표정과 눈빛을 가졌거든. 엄마가 노래 부를 때 입는 옷을 만드는 오빠는 눈이 네 개나 있어. 엄마는 오빠가 만든 옷만 입어. 세상에서 제일 멋있대. 그림도 잘 그려. 방마다 오빠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어. 난 모두들 너무 좋은데, 왜 없어지길 바랄까. 왜 스노우를 죽였을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바이올렛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사람들은 더한 짓도 해..."

옐로가 말했다.


바람에 날려 온 광고지가 옐로의 발아래 떨어졌다. 옐로는 종이를 주워 훑어보았다. 풍선 같은 가슴에 모래시계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여자가 노래하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약도와 전화번호도 있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내밀고 광고 문구를 소리 내 읽었다.

“여가수 구함. 초특급 대우. 레인보우 극장. 오디션 문의 및 예약 34545-776456.”

옐로가 바이올렛에게 광고지를 건넸다. 바이올렛은 사진 속 여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이크를 잡은 여자의 오른쪽 손등에 심장 모양 문신이 있었다. 바이올렛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볼래?”

옐로가 물었다.

"나 같은 애는 안 돼.”

바이올렛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너보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없어.”

"거기 가면 먹을 걸 줄까?"

바이올렛이 물었다.

"달라고 해보자."

"으응..."

바이올렛이 끄덕였다.


광고지에 나온 약도는 정확하지 않았다. 옐로는 오거리에 있는 총기 상점 으로 세 번이나 되돌아왔다. 오거리 중 두 갈래 길이 남았다. 이번에도 길을 잘못 들면 극장 문이 닫힌 시간에나 도착할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옐로는 총포상 입구 옆에서 구걸하는 거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든 자세로 납작 엎드려 있었다. 손바닥을 위로 해서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었다. 여자 의 벽기둥 그늘 아래 뭔가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한 소년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잿빛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쓰고 있어서 회갈색 벽과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옐로가 쳐다보자 소년이 잿빛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옐로가 소년 옆에 가서 앉았다. 얼핏 열서넛으로 보였는데, 가까이 보니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얼굴이 온통 주근깨로 덮여 있고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대문니 양옆의 이가 서너 개씩 빠져 있어 아기 같기도 폭삭 늙은 노인 같기도 했다. 입고 있는 옷은 마치 먼지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맨발은 태어나서 한 번도 씻지 않은 것처럼 새까맣고 반들반들했다.

“여기...”

옐로가 광고지를 보여주며 말을 꺼냈다.

소년이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구걸하는 여자를 가리켰다. 여자의 손이 점점 느리게 움직이다가 한번 꿈틀 하더니 멈췄다. 잠에 깊이 빠진 것 같았다. 소년이 일어나려다가 포대기 안의 페루를 들여다보았다.

"죽었어?"

소년이 물었다.

"자고 있어."

옐로가 답했다.

"예쁘네."

소년이 씩 웃고는

"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옐로는 소년을 따라 모퉁이를 한없이 돌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점점 높은 오르막길이 되었다. 원뿔형 소용돌이를 타고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시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고급 승용차들이 오르막길을 쌩쌩 달려 올라갔다. 광고지에 그려진 약도는 완전히 엉터리였다. 혼자서는 절대로 극장에 갈 수 없었다는 것을 옐로는 깨달았다.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인적과 건물이 점점 드문드문해지고 가로등만 깜박였다. 너무 멀리 왔다. 옐로는 혼자 돌아갈 소년에게 미안해졌다.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해?”

옐로가 걱정스레 물었다.

“엄마 아냐.”

소년이 답했다.

"이름이 뭐야?"

바이올렛이 물었다.

"시네러스."

"무슨 뜻이야?"

"몰라.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

시네러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컴컴한 허허벌판을 뒤로하고 '마지막 호텔'이라는 황금색 간판을 단 웅장한 고층 빌딩이 서 있었다. 모든 창문에 불이 켜져 있어 도시 어느 곳보다 밝았다. 주차장에는 고급 차들이 빼곡했다. 호텔 입구에 중무장한 보안요원 일곱 명이 서 있었는데, 각자 암사자 만한 도베르만의 목줄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개들의 누런 송곳니와 시뻘건 혀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포대기 안의 페루가 바들바몸을 떨었다. 바이올렛도 옐로의 등에 더 바짝 달라붙었다.

"천천히 걸어."

시네러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호텔 입구를 막 지나쳤을 때, 도베르만 일곱 마리가 귀청이 떨어지게 짖으며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보안요원들이 목줄을 놓쳤다.

"뛰지 마."
시네러스가 소리쳤다.

옐로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꼭 감았다. 개들이 옐로의 몸을 툭툭 스치며 날아가듯 지나쳐갔다. 가만히 눈을 떠보니 저만치 비쩍 마른 들개 두 마리가 도망치는 게 보였다. 한 마리는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선두에 선 도베르만이 순식간에 따라잡아 목을 물고 흔들어댔다. 깽! 소리 한 번 지르고 쓰러진 들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나머지 여섯 마리가 달려들어 들개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다른 들개는 용케도 멀리 줄행랑을 쳤다. 보안요원들이 일제히 호루라기를 불었다.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여유롭게 걸어와 제자리에 앉았다.

"가자."

시네러스가 씩 웃었다.

옐로는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바이올렛이 등 뒤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개들은 옐로와 시네러스를 흘긋 쳐다보고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하품을 하거나 시선을 돌리거나 바닥에 엎드렸다.


호텔 건물 모퉁이를 돌았다. 시네러스가 우뚝 멈춰 섰다. 무심코 뒤따라 걷던 옐로가 부딪혀 비틀거렸다. 시네러스는 백여 미터 앞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레인보우 서커스'라는 커다란 아치형 옥상 간판이 보였다. 극장은 외따로 떨어진 검은 숲 한가운데 오아시스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시네러스가 주머니에서 누더기에 싸인 물건을 꺼내 옐로에게 건넸다.

"가져."

"뭐야?"

"필요할 거야."

시네러스가 씩 웃었다.

옐로는 누더기를 펼쳐 보았다. 장난감처럼 작은 권총이 들어 있었다. 금속이라 무게는 꽤 나갔다.

"진짜 총이야?"

옐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시네러스는 어느새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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