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장노아 Noah Jang
Nov 24. 2023
물소리를 따라 걷던 옐로는 계곡이 아니라 협곡을 만났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힐끔 내려다본 바이올렛이 무서워 덜덜 떨었다. 옐로가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차서 건너편으로 보냈다.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건널 방법이 없었다. 협곡을 건너면 도망쳐 나온 마을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고 옐로는 생각했다.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던 옐로는 협곡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밑동에 도끼 자국이 있었고 큰 가지들도 대충 정리된 상태였다. 벌목꾼들이 오가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만든 다리 같았다. 이끼가 낀 미끄러운 부분만 조심하면 발을 헛디딜 위험은 없어 보였다. 다만, 등에 업힌 바이올렛이 놀라 움직이면 중심을 잃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무서워."
바이올렛이 옐로의 팔을 꽉 붙들었다.
"절대 움직이면 안 돼."
옐로가 주의를 주었다.
"숨도 쉬면 안 돼?"
바이올렛이 소곤소곤 물었다.
"숨만 쉬어."
옐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넌 안 무서워?"
"그냥 땅이라고 생각하고 걸으면 돼."
옐로는 숨을 크게 들이내쉬고 발을 내디뎠다.
죽은 나무에도 이끼와 버섯이 자라고 있었고 각양각색 이름 모를 벌레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옐로는 등껍질에 사람의 눈 같은 무늬가 있는 커다란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언젠가 옐로네 가사 도우미가 버터에 구운 달팽이 요리를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 등껍질째 오븐에 구운 달팽이였다. 포크로 톡톡 치자 달팽이 집은 힘없이 벗겨졌다. 왠지 눈물이 나서 먹을 수 없었다. 그릇을 가지러 온 가사 도우미는 음식을 남긴 옐로를 원수라도 만난 듯 째려보면서 손가락으로 홀랑 달팽이들을 집어 먹었다. 옐로는 달팽이가 남긴 점액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스노우는 여기저기 킁킁 냄새를 맡고 큰 지네를 앞발로 차버리고 오줌도 누면서 여유롭게 뒤따라왔다.
무사히 다리를 건넜다. 바이올렛은 다 건넌 줄도 모르고 여전히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옐로는 일부러 말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아직이야?"
바이올렛이 울먹거리며 물었다.
"응."
잠시 후, 바이올렛이 또 물었다.
"아직이야?"
"응."
또 물었다.
"아직?"
"미안, 아까 건넜어."
옐로가 킥킥거리며 답했다.
"너무해! 난 무서워서 오줌 쌀 뻔했는데!"
바이올렛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옐로의 팔을 꼬집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쪽저쪽 달려보아도 동굴만 한 은신처는 찾을 수 없었다. 옐로는 바이올렛을 품에 안고 앞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커다란 바위 아래 앉았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스노우가 바짝 붙어 서서 비와 한기를 막아주었다. 혀를 길게 늘어뜨린 스노우의 입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천둥과 번개에 온 산이 흔들렸다. 바이올렛은 옐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천둥소리에 맞서 소리를 질러댔다. 옐로는 바이올렛에게 담요를 뒤집어씌우고 꼭 안아주었다. 사방에서 흙탕물이 흘러넘치고 총알 같은 빗줄기가 바위와 나무와 땅을 사정없이 갈겼다. 폭우는 약해졌다가 세졌다가 몇 시간이나 내렸다.
옐로는 바이올렛을 안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저리고 아팠던 다리가 점점 무감각해지고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처럼 느껴졌다. 흙탕물에 쓸려가던 돌멩이들이 바위에 부딪쳐 튀어 올랐다.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옐로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애써 버티던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옐로는 바이올렛을 온몸으로 감쌌다.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옐로가 폭우에 드러난 커다란 나무뿌리들 사이로 공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엄청난 소음에 감각이 무뎌져 아픈 줄도 몰랐다. 스노우가 따라오며 짖는 소리도 빗소리에 막혀 희미했다. 물줄기는 둑이 터진 것 같이 점점 커지고 거세졌다. 한참 떠내려가던 옐로는 순간 공중에 떴다가 폭포수 아래로 추락했다. 옐로는 바이올렛을 놓치고 정신을 잃었다.
스노우가 옐로의 팔을 물어 끌고 헤엄쳤다. 스노우의 등에 올라탄 바이올렛은 두 팔로 스노우의 목을 꼭 얼싸안았다. 천둥소리가 멀어지고 번개가 흐릿해지더니 비가 그쳤다. 해가 나고 새들이 날기 시작했다. 스노우는 옐로와 바이올렛을 물가로 끌어냈다. 옐로는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찢어진 가면이 너덜거렸고 손과 발에 온통 피멍이 들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엉엉 울면서 갈고리 손으로 옐로의 가면을 어루만졌다. 스노우가 컹컹 짖고 풀쩍 뛰며 옐로의 가슴을 앞발로 퍽퍽 쳐댔다. 옐로가 물을 잔뜩 뱉어내고 기침을 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살았다!"
바이올렛이 기뻐 펄쩍 뛰었다.
"신발이 없어."
그러다 금세 슬픈 얼굴을 하고 옐로의 맨발을 가리켰다.
“너 배꼽 보여...”
옐로가 배 부분이 찢어진 바이올렛의 원피스를 가리켰다.
"우리 꼭 거지 같다.”
바이올렛이 배꼽을 가리며 말했다.
“거지 같은 아니고 거지야.”
옐로의 말에 바이올렛이 까르르 웃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 옐로와 바이올렛은 잠이 들었다. 스노우가 옐로의 신발 두 짝을 찾아 물고 왔다. 진흙탕에 박혀 있었는지 신발 모양 흙덩어리 같았다. 스노우는 신발을 옐로 옆에 놓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누웠다.
옐로는 스노우와 숲을 돌아다니며 산딸기와 으름 열매를 땄다. 스노우는 어디론가 여러 번 달려가 망고처럼 생긴 노란 열매를 네 개나 물고 왔다. 예상보다 많은 먹을거리가 생겼다. 옐로는 부채만큼 커다란 잎 여러 장을 따서 으름덩굴줄기로 엮어 바구니를 만들었다. 잠에서 깬 바이올렛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오는 옐로와 스노우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스노우가 달려가 바이올렛 앞에 노란 열매를 내려놓고 컹컹 짖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먹어.”
바이올렛이 열매를 스노우 쪽으로 밀어주었다. 스노우는 과일을 삽시간에 먹어치우고 바닥에 떨어진 즙까지 말끔하게 핥았다. 옐로와 바이올렛은 산딸기를 배부르게 먹었다. 손과 입가와 혀에 산딸기 물이 들었다.
"오늘도 산에서 자?"
바이올렛이 물었다.
"응."
옐로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적당한 잠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첫째 날에는 고인돌처럼 생긴 바위 아래서 셋이 같이 잤다. 벌레들이 얼굴이며 목이며 기어 다녀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둘째 날에는 나무 위에서 잤다. 혼자 나무 밑에 있는 스노우 걱정에 바이올렛이 잠을 설쳤다. 셋째 날에는 운 좋게도 찢어진 낙하산인지 열기구인지 거대한 방수포 조각을 발견해 침낭처럼 만들어 잤다. 방수포를 끌고 다니고 싶었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밤에 숲에서 푹 자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옐로와 바이올렛은 볕이 잘 들고 평평한 바위를 발견할 때마다 낮잠을 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랑이나 늑대 같은 큰 육식 동물은 멸종된 지 오래라 물려 죽을 일은 없었다.
"아직 멀었나?"
바이올렛이 물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옐로는 먹고 남은 열매를 바구니에 싸서 허리에 묶었다.
점차 경사가 완만해졌다. 사람들의 왕래 흔적이 보이는 숲길에 접어들었다. 옐로는 저만치 지팡이를 든 반백의 남자와 예닐곱 살 정도의 소년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소년의 하얀 셔츠와 운동화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옐로는 자신의 옷과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도망칠지 그냥 지나칠지 고민하며 나무 뒤에 숨었다. 바이올렛은 잠들어 있었다. 남자와 소년은 바닥을 보며 걷느라 옐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타고 올라갈 만한 나무가 있는지 옐로가 주변을 살피는 사이 스노우가 신나게 달려 내려갔다. 남자와 소년이 활짝 웃으며 스노우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않았다. 옐로는 나무 뒤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점점 가까워졌다. 소년이 옐로의 가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남자가 소년의 등을 살짝 쳐서 그만두게 했다. 그들과 엇갈려 지나친 순간, 옐로는 몸을 휙 돌려 뒷걸음질을 쳤다. 갑자기 뒤에서 지팡이로 때리거나 돌을 던질 수도 있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옐로는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문득 바이올렛의 아빠와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올렛을 찾으러 산에 올라가는 게 아닐까? 옐로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