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표는 은행 로비에 12시 45분에 도착했다. 약속은 2시였다. 일찍 도착하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고칠 생각도 없었다.
1층 로비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기업금융 창구 앞 대기 의자에 앉았다. 정장은 3년 전에 산 네이비였다. 구두는 작년에 한 번 굽을 갈았다. 넥타이는 안 맸다. 요즘 대표들은 넥타이 안 맨다. 이 대표도 그 정도는 알았다.
핸드폰으로 회사 메신저를 열었다. 박 팀장이 물어본 게 하나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 중부발전 프레젠테이션에 CTO인 김 이사도 같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표는 "네, 그렇게 하시죠"라고 답장했다. 박 팀장은 믿는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박 팀장이 물어보는 건 대부분 이미 답을 정해놓고 확인하는 거였다. 그래서 편했다.
메신저를 닫고 카카오톡을 열었다. 지영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서진이 유치원에서 오늘 친구랑 싸웠대ㅋㅋ 나 지금 상담받으러 감
이 대표는 답장을 쓰려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화이팅. 저녁에 얘기해.
'화이팅'이 좀 가볍나 싶었는데 이미 보냈다. 지영은 1초쯤 뒤에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다행이다.
"이 대표님, 안녕하세요."
정 차장이 창구 옆 회의실에서 나왔다. 이 대표는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셨어요?"
"네.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매일 똑같죠."
둘 다 안 웃었다. 웃을 자리가 아니었다. 회의실로 들어갔다. 탁자 하나, 의자 네 개, 벽에 은행 달력. 2월 달력이 3월까지 안 바뀌어 있었다. 이 대표는 그걸 봤다가 다시 정 차장을 봤다.
"자료 가져오셨죠?"
"네."
이 대표는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지난 3년 재무제표, 올해 1분기 매출 현황, 주요 거래처 리스트, 수주 예정 프로젝트 파이프라인. 정 차장은 받은 자료를 천천히 넘겨봤다.
"3년 연속 흑자 맞으시고요."
"네."
"매출이… 작년 대비 조금 줄었네요."
"네. 그 부분은 이쪽 자료에 설명을 좀 적어놨습니다."
정 차장이 그 페이지를 열었다. 이 대표는 설명을 시작했다. ESG 시장의 단기적 조정, 그러나 규제 강화 추세, 중견기업 시장으로의 확장, 신규 SaaS 모듈 출시 예정. 말은 막힘이 없었다. 이 대표는 같은 말을 한 달에 네 번쯤 했다. 투자자 앞에서도 하고, 거래처 앞에서도 하고, 지금은 은행에서도 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 스스로도 믿어지는 순간이 있다.
정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게 동의인지 업무상 리액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표님."
"네."
"저희가 이번에 내부 기준이 조금 바뀌어서요."
올 것이 왔다. 이 대표는 표정을 그대로 뒀다.
"네."
"한도 유지는 어려울 것 같고요, 연장은 해드리는데, 한도를 2억에서 1억 5천으로 조정하는 방향으로 검토 중입니다."
5천만 원. 이 대표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돌렸다. 5천만 원은 직원 한 명 반년 치 인건비였다. 아니면 서버 운영비 열 달이었다.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 쓸 일이 없으면.
"금리는요?"
"기존보다 0.7%포인트 올라갑니다."
이 대표는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놀란 표정을 지으면 안 됐다. 놀란 표정을 지으면, 이 대표가 실제로 이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 됐다. 필요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은행은 돈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이 대표는 창업 초기에 그 사실을 배웠다.
"알겠습니다."
정 차장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시고 답 주셔도 됩니다."
"아니요, 진행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네, 그럼 서류 준비해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 차장이 자료를 넘기다 한 곳에서 멈췄다.
"대표님 개인 신용대출도 저희 은행에 있으시죠?"
"네."
"회사 한도랑 별개로 관리되긴 하는데, 같은 은행에 묶여 있다는 건 한 번 인지하고 계세요."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와 개인이 같은 은행에 묶여 있다는 말은, 한쪽이 흔들리면 다른 쪽도 같이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정 차장이 굳이 그 말을 한 건, 묻지 않은 우려를 한 마디로 전한 거였다.
정 차장이 일어섰다. 이 대표도 일어섰다. 악수를 했다. 정 차장의 손은 차가웠다. 이 대표의 손도 차가웠다. 회의실 문을 나서면서 이 대표는 정 차장에게 한 마디 더 했다.
"차장님, 혹시 중견기업 쪽 소개해 주실 만한 데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탄소배출량 관리 시스템 필요한 곳이요."
"아, 네.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알아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대표도 알고 말한 거였다. 그래도 말은 해야 했다. 말하지 않으면 기회는 없다. 말해도 기회가 없을 수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확실히 없다.
은행을 나와서 이 대표는 바로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를 시켰다. 구석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은 꺼내지 않았다. 가방도 열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5천만 원이 줄었다. 금리가 올랐다. 이게 오늘의 결과였다. 나쁘지 않았다. 한도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자기를 설득하는 건지, 정말 나쁘지 않은 건지, 이 대표는 요즘 구분이 잘 안 됐다.
핸드폰을 꺼내서 박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은행 미팅 잘 끝났습니다. 한도는 유지됐어요. 금리는 조금 오릅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한도 2억에서 1억 5천은 유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해야 했다. 대표가 불안하면 회사가 불안해진다. 이 대표는 그것도 창업 초기에 배웠다.
박 팀장이 답장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오늘 외근이시죠? 내일 오전에 미팅 안건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 대표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아메리카노는 아직 뜨거웠다.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뜨거워서 혀가 살짝 데었다. 그게 이상하게 반가웠다. 뜨겁다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창밖으로 점심시간이 끝난 회사원들이 지나갔다. 대부분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사원증이 가끔 부러웠다. 사원증이 있다는 건, 매월 25일에 들어오는 숫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과 가족뿐이라는 뜻이었다. 이 대표는 12명의 사원증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12명의 25일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가끔, 사원증 목에 건 저 사람들 중에도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 중에 한 명은 부장 눈치를 보느라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을 수 있고, 저 중에 한 명은 다음 달 전세 보증금을 어떻게 올려줄지 고민 중일 수 있고, 저 중에 한 명은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병원비가 걱정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만의 잔고가 있었다. 이 대표의 잔고는 회사 통장에 찍히는 숫자였지만, 저 사람들의 잔고는 다른 이름으로 어딘가에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게 위로인지, 자기 합리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메리카노를 반쯤 마셨을 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 대표는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 대표님. 저 그린스텝 김 대표입니다. 기억하세요?"
기억했다. 작년 연말 환경 스타트업 모임에서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이었다. 이 대표보다 두 살 어렸고, 자기 회사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던 사람이었다. 그때 이 대표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5년 전에는 저렇게 말했었지.
"네, 기억하죠.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다가… 요즘 좀 힘듭니다, 솔직히. 대표님은 어떠세요?"
이 대표는 잠깐 멈췄다. '솔직히'라는 말이 걸렸다. 이 바닥에서 '솔직히'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들 잘 지낸다고만 했다.
"저도… 뭐, 비슷합니다."
"대표님도요?"
"네."
잠깐 침묵이 있었다. 김 대표가 먼저 말했다.
"대표님, 혹시 시간 되시면 술 한잔하실 수 있을까요? 다음 주 언제든 괜찮으시면요."
이 대표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바쁘다고 미뤘을 거였다. 바쁜 척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바빴고, 바쁘지 않아도 모르는 사람과 술 마시는 건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이 사람과 한잔하고 싶었다. '솔직히'라고 먼저 말한 사람이었다.
"네. 다음 주 수요일 저녁 괜찮으세요?"
"네, 좋습니다. 장소는 제가 찾아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이 대표는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셨다. 혀가 다 식어 있었다. 약속 하나가 생겼다. 그게 별건 아니었지만, 별거 아닌 게 필요한 날이었다.
회사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이 대표는 창밖을 봤다. 지하철이 지상 구간을 지날 때, 저 멀리 한강이 보였다. 3월이었다. 아직 나무들은 회색이었다. 이 대표는 올해 봄에 서준이와 자전거를 타기로 약속한 걸 떠올렸다. 지난달에 한 약속이었다. 그런 약속을 자꾸 미루면 안 된다는 걸, 이 대표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자꾸 미뤘다.
이번 주말엔 꼭 타야지. 이 대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마 또 다른 일이 생길 거라는 것도, 이 대표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