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표의 회사는 선릉역에서 걸어서 7분 거리에 있었다. 12층 건물의 8층이었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3층이었다. 직원이 다섯 명이었을 때였다. 5년 전에 8층으로 올라왔다. 그때는 직원이 17명이었다. 지금은 12명이었다. 사무실은 그대로였다.
이 대표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시각은 4시 20분이었다. 박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개발팀 쪽에서 김 이사가 모니터 두 개 사이로 손을 살짝 들었다. 그게 다였다. 나머지 직원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대표실은 따로 없었다. 창업 초기엔 없어서 못 만들었고, 그 다음엔 만들 생각이 없어서 안 만들었다. 창가 쪽 끝에 책상 하나가 있었다. 책상 뒤에 화분 두 개.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아 있었다. 누가 물을 주는 건지 이 대표도 몰랐다.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메일이 32개 와 있었다. 그중 읽어야 하는 건 예닐곱 개였다. 나머지는 뉴스레터, 광고, 세미나 초대였다. 세미나 초대 메일을 볼 때마다 이 대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3년 전에는 이 대표도 패널로 나갔었다. 요즘은 아무도 안 불렀다. 초대받지 못하는 건 편하면서도 서운했다.
"대표님, 잠깐 괜찮으세요?"
박 팀장이었다. 이 대표는 고개를 돌렸다. 박 팀장은 노트북을 들고 서 있었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박 팀장이 옆 의자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중부발전 프레젠테이션 자료였다. 박 팀장은 자기가 만든 자료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러 온 거였다. 이 대표는 그런 사람이 귀하다는 걸 알았다.
"여기 세 번째 슬라이드요."
"네."
"우리 경쟁사 대비 강점이라고 해놨는데요, 솔직히 이 부분 들어가면 질문 나올 것 같아요. 기술적으로 완전히 앞선다고 하기에는 좀…"
"어떤 질문요?"
"측정 정확도에서 우리보다 낮은 회사 지표를 너무 낮게 표시한 것처럼 보여요. 실제로는 격차가 이 정도는 아니거든요."
이 대표는 슬라이드를 봤다. 박 팀장 말이 맞았다. 이 정도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프는 부풀려진 거였다. 발표할 때는 그럴싸하지만, 뒤에서 엔지니어 출신 담당자가 검토하면 걸리는 종류의 과장이었다.
"빼죠."
"빼도 괜찮겠어요? 강점 부각이 좀 약해지는데."
"괜찮아요. 정확하지 않은 숫자는 오히려 독이에요. 중부발전 이 차장님 꼼꼼한 분이에요. 그 분이 한 번 불신하면 다음 미팅은 없어요."
"네, 수정하겠습니다."
박 팀장은 노트북을 덮었다. 일어서려다가 다시 앉았다.
"대표님."
"네."
"오늘 은행 미팅, 진짜로 괜찮은 거죠?"
이 대표는 박 팀장을 봤다. 박 팀장도 이 대표를 봤다. 박 팀장은 45살이었고, 두 아이의 아빠였고, 이 대표보다 한 살 많았다. 입사한 지 4년이 됐다. 박 팀장이 "진짜로 괜찮은 거죠"라고 물을 때, 그건 대표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가정을 걱정하는 거였다. 이 대표는 그걸 알았다. 안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당연한 거였다.
"괜찮아요. 한도는 줄었어요. 2억에서 1억 5천으로요. 금리는 0.7 올랐고요. 현금흐름엔 영향 없어요."
박 팀장이 잠깐 이 대표를 봤다. 박 팀장은 아까 이 대표가 보낸 메시지보다 지금 말이 사실에 가깝다는 걸 눈치챘다. 박 팀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박 팀장은 더 묻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 대표는 그게 고마웠다. 더 묻는 건 박 팀장도 불편했을 거였다.
오후 5시, 이 대표는 회의실로 팀원들을 불렀다. 주간 회의였다. 매주 화요일 5시. 이 시간만큼은 팀원들도 퇴근 준비를 멈추고 들어왔다.
회의실 테이블에는 8명이 앉았다. 나머지 4명은 원격 근무 중이었다. 개발 두 명, 디자이너 한 명, 영업 한 명. 그중에 원격 근무가 잦은 영업 담당 최 과장은 화면에 접속을 안 한 채로 있었다. 오디오만 들어와 있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최 과장님 계세요?"
화면에서 대답이 없었다.
"최 과장님."
"아, 네. 접속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메라가 지금 좀…"
"괜찮아요. 목소리만 들리면 됩니다."
이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 과장은 지난달에 두 번, 이번 달에 한 번, 회의 중에 카메라를 안 켰다. 카메라 얘기를 한 번 더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넘어갔다. 그런데 넘어갈수록 다른 사람들도 카메라를 안 켜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게 걱정됐다. 이 대표는 이런 걸 자꾸 생각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생각하게 됐다.
회의는 한 시간 걸렸다. 각 팀별 주요 사안, 다음 주 예정 미팅, 막힌 부분. 개발팀에서 서버 비용 이슈가 나왔다. 디자이너는 새 모듈 UI 초안을 공유했다. 영업팀에서는 중견기업 두 곳과 미팅이 예정돼 있다고 보고했다.
"중견기업 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이 대표가 최 과장에게 물었다. 최 과장은 목소리로 답했다.
"A사는 다음 주 화요일에 실무진 미팅 잡혀 있고요, B사는 담당자가 바뀌어서 새로 소개받는 중입니다."
"B사는 담당자가 왜 바뀌었어요?"
"아… 그게, 저도 아직 정확히는 못 물어봤습니다."
"다음 미팅 전까지 확인 부탁드려요. 왜 바뀌었는지에 따라 접근 방법이 달라질 수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이 대표는 속이 쓰렸다. 이 질문은 최 과장이 미리 했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이 대표가 묻지 않으면 물어보지 않는 사람이 영업팀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영업 담당이라는 자리는 원래 이 대표가 묻기 전에 먼저 답을 준비해 놓는 자리였다. 적어도 이 대표 생각에는 그랬다.
그런데 이 대표는 최 과장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말했다가 최 과장이 그만두면, 당장 영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었다. 이 대표가 직접 하면 되지만, 이 대표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직접 하고 있었다. 말할 타이밍은 계속 미뤄졌다. 미뤄진 말은 회사 안 어딘가에 쌓여 갔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회의실을 나갔다. 김 이사가 남았다. 김 이사는 창업 1년 차에 합류한 공동창업자 같은 존재였다. 공동창업자는 아니었다. 지분은 없었다. 이 대표가 몇 년 전에 지분을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김 이사가 거절했다. "저는 월급만 받으면 됩니다. 지분은 부담스러워요." 그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그때 김 이사를 존경했다. 존경하면서도 조금 서운했다. 서운한 자기가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았다.
"형, 잠깐 괜찮아요?"
회의실에 둘만 남으면 김 이사는 이 대표를 '형'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나이 차이가 4살 났다.
"네, 뭐예요."
"최 과장 건, 말씀하실 때 된 거 같은데요."
이 대표는 가만히 있었다.
"두 달 전부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형도 알고 있고요."
"알죠."
"그럼 왜 안 하세요."
"지금 내보내면 영업이 비어요."
"지금 그대로 두면 다른 팀원들이 흔들려요. 비교되니까요."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 이사 말이 맞았다. 김 이사는 늘 맞는 말을 했다. 그래서 가끔 힘들었다.
"조금만 더 봅시다. 이번 달까지. 이번 달 성과 보고 안 되면 제가 얘기할게요."
"형, 그거 세 달째 하시는 말씀이에요."
이 대표는 김 이사를 봤다. 김 이사는 웃지 않았다. 이 대표는 자기가 웃으려고 했다가 그만뒀다. 웃을 자리가 아니었다.
"알았어요. 다음 주까지 결정할게요."
"네."
김 이사는 일어나서 나갔다. 이 대표는 회의실에 혼자 남았다. 형광등이 좀 깜빡였다. 교체할 때가 됐다는 걸 이 대표는 두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것도 말하지 않은 일 중 하나였다.
저녁 7시 반에 이 대표는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마지막으로 나간 건 김 이사였다. 김 이사는 아내가 오늘 회식이라 아이들 저녁을 자기가 차려야 한다고 했다. "형, 먼저 갑니다." 라고 말하고 나갔다. 이 대표는 손을 흔들었다.
혼자 남은 사무실은 조용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서버실에서 나오는 희미한 팬 소리. 그게 다였다. 이 대표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봤다. 내일 할 일 목록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이 14개 있었다. 다 해도 다음 날 또 14개가 있을 거였다. 이 대표는 목록을 닫았다.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맞은편 건물 사무실 몇 개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저기도 누군가 혼자 남아 있겠지. 이 대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사무실에 혼자 있는 시간은 집에서 새벽 3시에 깨어 있는 시간보다 덜 불안했다. 집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공간이었고, 사무실은 이미 있는 것을 관리하는 공간이었다. 지키는 것보다 관리하는 게 덜 무거웠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영이었다.
"여보, 오늘 언제 와?"
"지금 나가요. 8시 반쯤 도착할 거 같아요."
"저녁 먹고 올 거지?"
"응, 간단히 먹고 갈게."
"애들 재우기 전엔 왔으면 해서. 서준이가 오늘 받아쓰기 시험 봤는데 너무 자랑하고 싶어 해."
이 대표는 잠깐 멈췄다.
"몇 점이에요?"
"100점."
이 대표는 웃었다. 이번에는 연습 없이 웃었다.
"갈게요. 바로 갈게요."
"응, 조심히 와."
전화를 끊고 이 대표는 노트북을 덮었다. 가방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 불을 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이 대표는 서준이 받아쓰기 100점짜리 종이를 떠올렸다. 어떤 글자를 썼을까. 100점이면 다 맞았다는 거니까 틀린 게 없겠지. 다 맞은 종이를 들고 아빠를 기다리는 8살. 그 장면이 떠오르니 은행도, 최 과장도, 박 팀장의 걱정도, 꺼져 있던 카메라도, 형광등도, 잠깐 다 멀어졌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이 대표는 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내려가는 동안 이 대표는 한 번 크게 숨을 쉬었다. 가슴이 조금 덜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