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은 9시 반에 아이들을 재웠다. 재우기 전에 항히스타민 한 알을 먹었다. 어제도 먹었고 그제도 먹었다. 만성 두드러기는 작년 봄부터였다. 처음엔 한두 달이면 가라앉을 줄 알았다. 1년이 넘었다. 지영은 약 봉지 안의 알약 수를 매주 세고 있었다. 매주 세는 자기가 우스워서 그만두려다가 그만두지 못했다. 14년 동안 한 번도 약을 매일 먹은 적이 없었던 사람이, 1년째 매일 먹고 있었다.
서준이는 오늘 받아쓰기 100점을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어 했지만, 8시 반에 들어온 아빠가 저녁을 먹는 사이에 벌써 졸았다. 8살은 그런 나이였다. 기다리다가도 금방 잠드는 나이.
민수는 서준이 머리맡에 앉아서 100점짜리 받아쓰기 종이를 한참 봤다. 지영은 그걸 문 앞에서 봤다. 민수가 종이를 보면서 조금 웃었다. 지영은 그 웃음이 반가웠다. 요즘 저런 웃음을 거의 못 본 것 같았다.
"자요, 서준이?" 민수가 작게 물었다.
"응, 조금 전에 잠들었어."
민수는 종이를 서준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자석으로 벽에 붙여 놓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영은 그것도 봤다. 민수는 요즘 작은 결정도 자꾸 미뤘다.
거실로 나와서 지영은 차를 끓였다. 캐모마일. 캐모마일은 회사 다닐 때는 마실 일이 없는 차였다. 회사 다닐 땐 커피만 마셨다. 14년 동안 커피만 마시고 살았는데, 4년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부터 캐모마일을 알게 됐다. 알게 됐다기보다, 다른 차를 마실 만큼 시간이 생긴 거였다. 시간이 생긴 게 좋은 일이었는지 아닌지는, 지영도 4년 동안 답을 못 찾았다.
민수는 카페인에 민감해진 지 한참 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녁에 커피도 마시고 잠도 잘 잤는데, 요즘은 오후 3시 이후에는 차도 조심했다. 지영은 그 변화를 언제 알았을까.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날 민수가 "캐모마일 있어?" 하고 물었을 때 지영은 마트에서 캐모마일을 사 왔다. 그 뒤로 저녁에는 캐모마일이었다.
"고마워." 민수가 잔을 받으며 말했다.
지영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앉으면서 한 번 옆구리에 손을 댔다. 잠깐 숨을 참았다. 한참 전부터 가끔 오는 통증이었다. 병원에서는 신경성이라고 했다. 신경성이라는 단어는 의사가 원인을 모를 때 쓰는 단어라는 걸 지영도 알았다.
거실 불은 반만 켰다. 전체 조명은 민수가 피곤해할 때가 있어서, 요즘엔 한쪽만 켜는 게 습관이 됐다. 이것도 지영이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 은행 어땠어?"
민수는 잔을 한 모금 마셨다.
"괜찮았어. 연장됐어."
"그래?"
"응."
지영은 더 묻지 않았다. 민수가 '괜찮았어'라고 말하는 톤을 지영은 안다. 정말 괜찮을 때의 '괜찮았어'와, 괜찮지 않은데 지영에게 말하고 싶지 않을 때의 '괜찮았어'는 같은 세 음절이지만 다른 말이었다. 지영은 후자 쪽이라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묻지 않기로 했다. 이건 지영이 몇 년 전에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규칙을 정한 날은 지영이 둘째를 임신했을 때였다. 그때 민수는 회사가 처음 망할 뻔했다. 망할 뻔했다는 말을 지영은 그로부터 반 년 뒤에 들었다. 다 지나고 나서였다. 민수는 그때 "얘기하면 스트레스 받을까 봐 안 했어"라고 말했다. 지영은 화가 났다. 화가 난 자기에게 더 화가 났다. 임신한 아내를 배려한 남편에게 화를 내는 건 이상한 일 같았다. 그래서 화를 접어두고 규칙을 만들었다.
먼저 묻지 않기. 먼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 단, 티는 내기.
티를 내는 것까지가 규칙이었다. 묻지 않지만,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알게 하기. 지영은 그 방식이 민수에게 가장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맞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서진이 유치원 일은?" 민수가 먼저 물었다.
"아, 그거."
지영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캐모마일은 지영에게도 좋았다.
"친구 하나랑 블록 때문에 다퉜대. 그 친구가 서진이가 만든 성을 무너뜨렸다고. 서진이가 울어서 선생님이 중재했고, 그 친구가 사과했고, 서진이는 사과받고 또 울었대."
"왜 또 울어?"
"'성이 이미 없어졌잖아.' 그랬대."
민수가 웃었다. 오늘 두 번째 웃음이었다. 지영은 속으로 세고 있었다.
"서진이답다."
"응, 서진이다워."
지영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근데 상담 선생님이 그러셨어. 서진이가 감정 표현을 잘하는 편이긴 한데, 뭔가 쌓아두는 것도 있는 것 같다고."
"쌓아둬?"
"응. 평소에는 밝은데 가끔 툭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지는 게 있대."
민수는 잔을 내려놨다. 얼굴이 조금 굳었다.
"…엄마가 뭐 잘못했나."
"아니,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야."
지영은 빨리 말했다. 민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늘 자기 탓으로 가져갔다. 지영은 그걸 알았다. 요즘은 더 그랬다.
"그냥 6살인데 생각이 좀 많은 아이라는 거야. 선생님도 걱정해서 한 얘기 아니고, 그냥 알려주신 거야."
"그래?"
"응. 아빠 닮아서 그런가 봐."
지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처럼. 그런데 민수는 웃지 않았다. 민수는 잔을 다시 들었다. 캐모마일이 식어가고 있었다.
"내가 닮게 한 거면 미안하네."
지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민수가 요즘 이런 말을 하는 게 지영은 걱정됐다. 예전의 민수는 이런 말을 농담으로 받아쳤을 거였다. "아빠 닮아서 똑똑한 거야" 같은 말로. 요즘은 그게 안 됐다.
지영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척하고 안방으로 갔다. 옷장 옆에 걸어둔 민수의 양복 재킷에서 지영은 뭔가를 봤었다. 일주일쯤 전이었다. 세탁을 맡기려고 주머니를 확인하다가 안쪽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하나 발견했다. 처방약이었다. 처방전 라벨에는 병원 이름과 약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영은 그 이름을 검색해 봤다. 공황장애 약이었다. 지영은 그날 부엌에서 30분쯤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었다. 서진이가 "엄마, 왜 그래?"라고 물었을 때에야 지영은 움직였다.
그 뒤로 일주일 동안 지영은 민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먼저 묻지 않기. 그게 규칙이었다. 그런데 이건 규칙으로 덮기엔 너무 큰 일 같았다. 공황장애를 혼자 끌어안은 지가 얼마나 됐을까. 병원에는 언제부터 다녔을까. 약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그런 질문들이 지영의 머릿속에서 계속 돌았다. 묻지 못한 질문은 소화가 안 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영은 자기에게 말 못 한 게 있었다. 지영의 화장대 서랍에도 약이 있었다. 항히스타민, 두통약, 호르몬 보조제, 가끔 먹는 수면 유도제. 부부가 각자의 서랍에 약을 쌓고 있는 동안, 부부는 서로의 서랍을 모르는 척했다. 지영은 그 모르는 척을 자기가 먼저 깰 자격이 있는지, 자기에게 한 번 물었다. 답은 안 나왔다.
지영은 재킷 주머니를 다시 확인했다. 약은 그대로 있었다. 지영은 약을 꺼내지 않고, 주머니만 한 번 눌러 보고 안방에서 나왔다.
거실로 돌아왔을 때 민수는 잔을 다 비우고 있었다. 지영은 맞은편에 다시 앉았다.
"여보."
"응."
"요즘 잠은 잘 자?"
지영은 자기가 '요즘 잠은 잘 자?'라고 물은 자기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렸다. 묻지 않기 규칙을 어긴 건 아니었다. 이건 회사 얘기가 아니었다. 몸 얘기였다. 그런데 지영은 마음이 조금 쿵쿵 뛰었다.
"응… 뭐, 그럭저럭."
"요즘 피곤해 보여서."
"피곤은 하지. 근데 괜찮아."
또 '괜찮아'였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진짜 힘들 때 한 번 정신과 가봤었어. 알지?"
"응, 알아."
"그때 약 먹으면서 좀 나아졌었어. 심하진 않았는데, 약 먹으니까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더라고."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영을 봤다. 지영도 민수를 봤다. 둘 사이에 몇 초가 지나갔다.
"어떻게 찾았어? 병원을." 민수가 물었다.
"그때 동료 한 명이 다니던 데 있어서 거기 갔지."
"아, 그렇구나."
"심하면 가는 것도 방법이야, 여보. 안 심해도 갈 수 있고. 요즘은 다들 다녀."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지영은 그 끄덕임을 봤다. 민수는 '나 다니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이 그 순간일 수도 있었다. 지영은 기다렸다. 1초, 2초, 3초.
"그래, 필요하면 말할게." 민수는 그렇게 말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은 지나갔다. 지영은 실망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실망했지만 실망을 얼굴에 올리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말할 거였다. 지영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10시 반. 민수는 먼저 샤워하러 갔다. 지영은 거실에 남아서 잔을 정리했다. 싱크대에서 잔을 헹구면서 지영은 창밖을 봤다. 거실 창 너머로 아파트 건너편 동의 불빛들이 보였다. 몇 개는 꺼져 있었고, 몇 개는 켜져 있었다. 지영은 켜진 불빛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집들도 각자의 규칙이 있겠지. 누군가는 묻고, 누군가는 묻지 않고, 누군가는 묻고 싶은데 못 묻고. 어떤 집은 싸우고 어떤 집은 침묵하고. 지영은 자기 집의 침묵이 괜찮은 침묵인지 요즘 자주 생각했다. 침묵에도 종류가 있었다. 서로 배려해서 만드는 침묵이 있고, 서로 지쳐서 만드는 침묵이 있었다. 지영은 자기와 민수의 침묵이 아직은 전자라고 믿었다. 믿지 않으면 살기 힘들었다.
민수가 샤워를 끝내고 안방으로 들어왔을 때 지영은 책을 읽는 척하고 있었다. 책은 넘기지 않았다. 같은 페이지에 세 번 눈을 줬다. 민수가 침대에 들어왔다.
"여보." 지영이 말했다.
"응."
"나 잠깐 안아줄 수 있어?"
민수가 잠깐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지영은 얼굴을 민수 쪽으로 돌렸다. 민수는 지영을 보다가, 팔을 열었다. 지영은 민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민수의 티셔츠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지영이 재작년부터 쓰는 브랜드였다. 이것도 언제부터 민수가 이 샴푸를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같이 사는 거구나. 지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민수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조금 빨랐다. 지영은 그 박동 수를 세지 않기로 했다. 세면 더 슬퍼질 것 같았다.
"여보."
"응."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돼."
지영은 민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말했다. 얼굴을 안 보는 편이 이 말을 하기 쉬웠다.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영은 민수의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가는 걸 느꼈다. 지영의 어깨를 당기는 팔에. 그게 대답이었다. 지영은 알아들었다.
지영은 거기서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또 오늘이 올 거였다. 그 중 어떤 날에는 민수가 먼저 말할 거였다. 지영은 그때까지, 묻지 않으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것도 규칙이었다. 지영이 자기 자신과 맺은 규칙.
민수의 숨이 조금씩 깊어졌다. 지영은 눈을 감았다. 이 집에서, 오늘 밤, 이 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지영은 자기가 잠들 때까지 한 시간 더 누워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매일 그랬다. 14년 동안도 그랬는데, 그땐 그게 잠 부족인 줄 알았고, 4년 동안도 그랬는데,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지영도 모르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