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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쌤 Dec 15. 2020

제발 아이들은 제가 암인걸 모르게 해 주세요

5. 교사와 환자 사이

 골수검사를 받고 내 병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 즉 혈액암이라는 게 확실해지기 전부터 나는 학교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고, 내가 2달 이상 병가를 쓰게 되자 학교에서는 발 빠르게 움직여주셔서 전담을 맡고 계시던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을 맡으시게 되고, 내 업무는 과학부장님과 전출입을 해보신 선생님 두 분께 나뉘어 가게 되었다.


 정보보안감사도 4월에 다 받았고, 품의도 다 해둔 상태에, 거의 해 둘 것은 다 해두었지만 마지막 정산과 학교생활기록부 정리 등 굵직한 일이 남아있었고, 전출입이 많았던 학교였기에 내 업무를 대신 받으신 선생님께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터였다.

 과학부장님께서 전화하셔서 어떻게 그걸 혼자 다했냐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면,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업무와 관련된 연락을 하며 병원에서 생활을 하는 도중에, 

우리 반 아이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선생님, 진짜 암이에요?"

 나는 평소에 아이들에게 내 사생활과 내 인적사항을 전부 밝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몇 살이에요?"

"나? 마흔세 살"

"에에에 이, 거짓말!"

"몇 살이라고 하면 믿을래?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뭘 물어"

"그래도 요 오"

"선생님은 결혼했어요?"

"아니?(양 손가락을 쫙 펼쳐 보인다.)"

"손은 왜 펴세요?" 

"야! 결혼반지 안 끼고 계시잖아!(다른 친구가)"

"아아아아"

"여자 친구는..."

"없어."


 나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나를 밝힘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부작용을 막기 위함이다. 

아이들이 나를 얼마 되지 않은 신규 교사임을 알면, 아래로 내려보는 일이 종종 있다. 또, 100분 중 1~2분의 학부모님은 교사의 나이에 따라 말투나 어조를 다르게 하시는 때가 있다.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 내 사생활과 내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는다.


 이 글의 현재 시점인 2015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주 뒤, 나는 바로 출근을 해서 아이들과 담담하게 방학 때 경험한 이야기를 나눴다.

"방학은 잘 보내고 왔니?"

"네! 아빠랑 같이 여행하고 왔어요!"

"그래, 기분 좋았겠다!"

"네! 다음에 또 갈 거예요!"

"그래, 사진도 많이 찍고!"


 아이들이 집에 가고, 나는 펑펑 울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지 못한 곳이 많아서. 그래도 꿋꿋이 아이들 앞에서는 웃으며, 아이들을 다음 학년으로 보냈다.

 저 때처럼, 나는 내 사생활과 내 감정을 아이들에게 전이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병가에 들어가면서, 교감선생님께 부탁드렸던 것이 하나 있다.

절대, 절대 아이들이 내 병가 사유를 모르게 해 달라, 내가 백혈병이라는 것을, 내가 암이라는 것을 절대 아이들이 모르게 해 달라, 그저 "무릎이 찢어져 수술했다."라고 아이들에게 말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검사 결과를 받은 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아이에게 암이냐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나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래서 "아니야, 선생님 무릎이 찢어져서 수술받느라 쉰 거야. 다른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얘기해줘."라고 이야기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같은 학교에 발령을 받아 친해진 선생님(형)에게 전화를 했다.

"형, 누가 우리 반 애들한테 내가 암이라고 얘기했나 봐요."

"뭐?? 설마, 아니겠지"

"우리 반 애한테 전화 왔어요. 암이냐고."

"내가 알아볼게."

 형이 알아본 바로는 내 소식을 들었던 선생님 중 한 명이 그걸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나는 좌절했다. 
 아이들과 학부모가 나를 이제 동정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제 내 전문성이 아니라 내 감정으로 호소하게 된 것이다. 
 나를 교사가 아니라 환자로 볼 것이 자명했다.
 바로잡아야 했다.


 바로 형에게 선생님들께 절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말씀드려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저 단순한 무릎 수술이라고 말해달라고도.


 나는, 그 당시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내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았다.  

6학년 담임을 맡아 초등학교 생활 마무리를 나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다시 맡겠다고 하여 6학년 담임을 하고, 졸업을 시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해(같은 해였지만, 1~2월이라 한 학년 위였다.) 맡았던 아이들도 6학년 담임을 다시 맡아 졸업을 시켰다. 


 나는 환자였지만, 학교에서만큼은 교사이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실수는 할 수 있을지언정 희망이 없이 죽어가는 교사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나은 환자 생활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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