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2.27. 목요일, 구름 많다 점차 맑음, 기온 7~16도
Almadén de la Plata ~ Monesteria 35km
07:20 알베르게에서 출발해서 10:40 El Real de la Jara까지 14km는 참나무 농장을 통과하는 구간이었다. 오르막 내리막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가고 말 것 같이 굽이굽이 진 길이었다. 별다른 변화도 없이, 짐을 벗어놓고 딱히 쉴 만한 곳도 없이 참나무 숲과 약간의 소나무 숲을 통과하는 길을 걸어야 했다.
거의 세 시간 반이 되어서야 마을이 하나 나타난다. 바르에 들어가니 동행 순례자들이 다 모여서 이른 점심을 먹다가 내 모습을 보더니 손을 흔든다. 결국 내가 꼴찌로 도착한 셈이다. 카페콘레체 한 잔과 보까디요를 주문하니 4.6유로, 착한 가격인데도 보까디요에는 치즈가 잔뜩 들어 있다.
11시에 다시 출발, 이제 해가 본격적으로 내리쬔다. 그래도 다행인 건 햇빛이 뒤 또는 옆에서 비친다는 것, 바람이 솔솔 부는데도 이마에서는 땀이 연신 흘러내린다.
길 좌우로는 역시 참나무 농장이 이어진다. 단지 나무 숲에서 노니는 대상이 바뀐다는 게 재밌다. 소, 말, 당나귀, 돼지, 양, 염소 등 바꿔가며 동물이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다. 어떤 길에서는 염소 똥을, 다른 길에서는 말똥을 피하려야 피할 수 없다. 밟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밟아야만 지나갈 수 있다. 질펀하게 내깔린 걸 피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피하려면 피할 수 있지만 걷는 리듬이 흐트러져 더 힘들 수 있다. 인생길에서 우리가 부딪쳐야 하는 일들도 그렇지 아니한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일을 피하려다, 비겁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고, 무서워서 도망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돌쇠처럼 정면으로 마주 서다 보면 생각지 않게 일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만 안다. 돌밭에서는 차라리 요령껏 돌을 밟고 가는 게 편하기도 하고, 발바닥 지압이라는 부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꼭 광야에 서야만 광야에 있는 게 아니다. 사막이 아닌 이 길을 걸으면서도, 푸른 초장이 이어지고 인간에게 무한한 유익을 주는 참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에서도 사막 한가운데, 또는 광야 한 복판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면 과장인가? 종의 다양성이 풍부한 한국의 산야와는 달리 올리브 나무면 올리브 나무들만, 참나무면 오로지 참나무들만, 소나무면 소나무만 늘어선 스페인의 산야에서 온종일 걸어도 지루함을 느끼는 건 비단 나뿐일까.
'프랑스 길' 가운데 부르고스부터 레온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메세타를 걸으면서 황무함과 황량함을 바라보며 느꼈던 황당함과는 다른 차원에서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참나무 밭, 이틀째 온종일 참나무만 보며 걸어야 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양 목장이 나타나고 알프스에서 보았음직한 하얀 데이지 꽃과 노란 민들레 꽃이 어우러진 풍경에 다소 위안을 받는다. 어미 양들은 대개 새끼 두 마리씩 데리고 다니며 풀을 뜯거나 앉아 쉬고 있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보이는 새끼 양들은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가 하면 어미 곁에 앉아 쉬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어미들은 자기 새끼를 어떻게 구분하며, 또 새끼들은 제 어미를 어찌 알아챌까. 등짝에 페인트로 써져 있는 숫자는 주인이 관리 목적을 위해 붙인 것일 뿐 양들에게는 그 수많은 비슷비슷한 무리 가운데 자기 어미나 새끼들을 분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다. 한 가지 더 궁금한 점, 어떻게 거의 동시에 새끼를 낳았을까 하는 것이다. 새끼들이 아직 탯줄을 달고 다닌다. 인공수정을 해서 새끼를 낳도록 한 것이겠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 뿐이다.
☆오늘로 안달루시아 세비야를 벗어나 엑스트레마드라 주 바다호스 자치구 지역으로 넘어왔다. 이틀 동안 광대한 시에라 노르테 Sierra Norte 자연공원 Parque Natural 지구를 통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