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다무라 카프카) "사에키 씨는 그 노랫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오시마)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지. 상징성과 의미성은 별개의 것이니까. 사에키 씨는 아마도 의미나 논리 같은 장황한 절차를 생략하고, 거기에 있어야 할 적당한 말을 가려 넣었던 거야. 공중을 날고 있는 나비의 날개를 살짝 붙잡는 것처럼, 꿈속에서 노랫말을 잡은 거지. 예술가란 장황한 걸 회피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잖아."
(다무라 카프카) "즉 사에키 씨는 그 가사의 말들을 어딘가 다른 --예를 들면 꿈의-- 공간에서 찾아냈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인가요?"
(오시마) "뛰어난 시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것이니까. 만약 시 속에 있는 말들이, 독자와의 사이를 이어주는 예언적인 터널을 찾지 못한다면, 그건 시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이 되지."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김춘미 옮김, 문학사상, 2008, 하권 31쪽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다무라 카프카와 오시마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 가운데 시의 본질이 거론됩니다. 의미나 논리 같은 장황한 절차를 생략하고 꼭 거기에 있어야 할 말을 넣는 시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설 속 이야기가 퍽 인상 깊습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홀수 장은 다무라 카프카, 짝수 장은 나카타 이야기가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면서 펼쳐집니다. 열다섯 살의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 다무라 카프카,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노인’ 나카타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춰 나가듯,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 읽다 보면 어느덧 하나의 얼개로 짜맞춰지는 소설입니다.
다무라는 네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 아버지와 단둘이 지냅니다. 유명한 조각가인 아버지는 어린 다무라에게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반복합니다.
“너는 언젠가 그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언젠가 어머니와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여섯 살 위인 누나 하고도 언젠가 육체관계를 맺게 될 거다.”
끔찍한 이야기지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리는 아버지의 예언을 다무라는 시한폭탄처럼 끌어안고 지냅니다. 결국 다무라는 가출해서 어떤 운명에 이끌리듯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무라 기념 도서관’에서 숨어 지내게 되지요. 다무라는 여기에서 어쩌면 자기 누나일지도 모르는 오시마 씨(남장 여자?)와 자신의 어머니라고 짐작하는 사에키 씨를 만나면서 현실과 꿈속을 오가는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제가 직접 그 도서관 서가에서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뽑아 읽다가 오시마 씨를 만나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다, 운 좋게도 도서관 2층 서재에서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사에키 씨의 얼굴을 스치듯 만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라고도 하겠지요.
원래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는 ‘해변의 카프카’는 소설 속에서 사에키 씨가 열아홉 살 때 먼 곳에 있는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쓴 시입니다. 여기에 곡을 만들어 아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노래로 불렀는데, 레코드판이 백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맨 앞에서 인용한 부분은 바로 다무라 카프카가 아버지를 피해 가출했다가 이곳에서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배려를 베풀어 주던 오시마 씨 사이에 ‘해변의 카프카’라는 노래 가사를 가지고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저는 시를 잘 모릅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시의 본질을 논하는 장면이 좀 낯설면서도 시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하며, 시를 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네에 있는 한 문학박물관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신달자 시인의 시를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낭송을 한 뒤, 신달자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 세계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신달자 시인이 한 이야기를 요약해 봅니다. “시인에게는 걸림돌이 있어야 도전받고 정진하게 되더라,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시를 쓰는 사람의 삶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라면서 ‘청어 장수 세 사람’ 이야기를 했습니다.
“청어 장수 ABC 셋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청어를 오래 살리는 일이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셋 중에서 A의 청어는 B, C의 청어보다 두세 시간 정도 더 오래 살았다. 두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A는 청어 항아리 속에 큰 가물치를 넣어두었다고 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스트레스가 청어를 긴장시켜 청어의 생명력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신달자 시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가물치'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의 강력한 창작 에너지를 유발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시인의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는 역설적으로 생명력을 증폭시킵니다. 뼈를 깎는 시련은 인간을 한 단계 성장시킵니다. 나아가 자신만의 완성된 내면의 우주를 만들어줍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의 시인이 비로소 탄생하고, 그 시인의 시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오시마가 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시를 좀더 가까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시를 읽거나 암송하고,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마흔 살이 라는 느지막한 나이에 주식 중개인이라는 안정된 직업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 이유를 ‘화가가 되고 싶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라고 말했듯이 저 또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시를 친구처럼 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평소 친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지내던 몇 명 시인들에게 저의 그런 마음을 털어놓았었습니다. 한 시인은 “왜 나이 들어 사서 고생하려고 하느냐.”라면서 극구 말렸습니다. 시를 쓴다는 건 기름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했습니다. 또 한 시인은 “그냥 수필로 승부하지, 경쟁이 심한 시에 껴들려고 하느냐.”라며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경쟁’이란 단어가 가시처럼 목에 결렸습니다. 시를 쓰고 싶다는데 왜 경쟁을 말하는 걸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인은 시집 100권 이상을 읽고 나서 얘기해 보자고 하더군요. ‘그러지요’ 했습니다. 다른 어느 시인에게 습작 시라고 몇 편 보여줬더니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딱 한 마디 하는데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시답지 않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느 시인은 너무 산문같이 정직하니 이리저리 비틀어 보고 꽈 보라고 조언하면서 날것들을 좀 더 숙성시켜 보라고 했습니다. 언어유희를 즐기라, 또는 언어를 갖고 춤을 추라는 의미였습니다. 점점 머리가 굳어가고 감성이 풍부하지 못한 저에게는 시를 배우고 쓰고 싶다는 의욕만 가지고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젊은 시인의 추천을 받아 시 창작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미지수이지만, 그것이 곧 스스로 던진 수수께끼를 풀려고 도전하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시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어쩌면 스스로 수수께끼 문제를 내면서 끊임없이 그 답을 얻어내려 하거나 조각난 퍼즐을 맞춰 나가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의미나 논리 같은 장황한 절차를 생략하고 꼭 거기에 있어야 할 말을 넣듯’ 시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꼭 행복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시를 원한다는 것은 시에서 단순히 위로를 받으려 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말입니다.
☞ “카프카라는 이름-사에키 씨는 그 그림 속의 소년이 자아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고독을, 카프카의 소설 세계와 결부해서 파악한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소년을 ‘해변의 카프카’라고 불렀다.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을 방황하고 있는 외톨이인 영혼. 아마 그것이 카프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위의 책, 4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