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손수건 한 장의 힘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를 읽고나서

by 장석규

"흰색 아마포 손수건은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나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마치 어느 어머니와 아들의 유품처럼 마지막까지 트렁크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결국 집에까지 가져왔다. 수용소에서는 그런 손수건을 쓸 일이 없었다. 그 수년 동안 물물교환 장터에서 먹을 것과 바꿀 수도 있었다. 그 손수건이면 설탕이나 소금, 어쩌면 좁쌀도 얻을 수 있었다. 배고픔에 눈이 멀어 그런 유혹도 느꼈다.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수건이 내 운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라는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으로 모습을 바꿨음을."

- 헤르타 뮐러, 『숨그네』, 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2010, 89쪽


‘손수건’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가슴에 달고 다니던 콧수건이 첫 기억일 것이다. 콧물로 꼬질꼬질해졌지만, 그 시절의 풍경 한 조각을 이루던 소박한 물건이었다.

1970~80년대 송창식과 윤형주의 듀엣 노래 <하얀 손수건>은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 떠나올 때 언덕에 서서 눈물로 흔들어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욱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손수건은 흔히 이별과 슬픔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하지만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 속 '하얀 손수건'은 이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손수건은 단순히 슬픈 유품이 아닌, 극한의 절망 속에서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해 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1945년 1월, 한겨울에 17살 레오(레오폴트 아우베르크)라는 앳된 청년이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는다. 5년간의 수용소 생활은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처참하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독이라는 터널 속에 내던져진 삶이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리던 레오는 어느 날 밤 몰래 구걸에 나선다. 허름한 집 문을 두드리자 한 늙은 여인이 문을 열어주고 따뜻한 감자 수프를 건넨다. 수프를 허겁지겁 떠먹는 레오의 코에서 콧물이 떨어지자 노인은 하얀 손수건을 건넨다. 아무도 사용한 적 없는 흰색 아마포 손수건이었다. 레오가 받은 하얀 손수건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차르 시대(1547~1721)에 만든 최고급 아마포로, 명주실로 뜨개질한 테두리에 작은 장미꽃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레오는 콧물을 닦지 않고 손수건을 그대로 가지고 나온다. 수용소로 돌아와서도 한 번도 쓰지 않고 트렁크에 보관한다. 눈이 멀 지경으로 배가 고파 손수건을 먹을 것과 바꿀 뻔한 적도 있었다. 레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집에서는 일상용품들의 아름다움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수용소에서 그런 건 잊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손수건의 아름다움이 나를 엄습했다. 그 아름다움은 나를 슬프게 했다. 나와 하나가 되었던 늙은 러시아 여인의 아들은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까. 나는 생각을 멈추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숨그네』, 88쪽)


레오가 손수건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수용소의 처참한 삶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느낌 속에서 비슷한 처지의 아들을 둔 노인에게 마음을 쏟는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레오는 “손수건이야말로 수용소에서 나를 보살펴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지금도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손수건이 곧 자신의 운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손수건을 지킨다. 결국 그 손수건을 들고 5년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얀 손수건은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레오의 삶을 지탱해 준 희망의 끈이었다. 레오가 수용소 생활을 버틴 건 노인에게 받은 손수건 덕분이다. 그 손수건이 아주 오래된 귀중한 것이어서가 아니다. 레오에게 손수건은 극한의 비인간적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감성을 붙잡아 준 더없이 소중한 끈이었다. 손수건은 곧 희망이었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긍정의 믿음이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작가 헤르타 뮐러는 우연히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 Oskar Pastior를 만난다. 파스티오르는 17살에 베를린에서 우크라이나의 수용소로 끌려가 5년간 강제노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헤르타 뮐러는 그의 수용소 시절 이야기를 모티프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은 인간의 극한적인 상황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공포와 불안을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승화시켜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받는다. 소설 제목 『숨그네』는 ‘숨’과 ‘그네’라는 말을 합쳐 붙인 것이다. 인간의 숨이 그네처럼 흔들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뜻으로 작가가 만든 말이다.


뮐러는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청중들에게 “당신은 손수건이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손수건이 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 생존과 인간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 안의 다른 어떤 물건도, 심지어 우리 자신마저도, 손수건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손수건은 두루 쓸모가 있었습니다. 콧물이 흐르거나 코피가 나거나 손이나 팔꿈치, 무릎에 상처를 입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이를 악물거나 눈물을 참을 때 쓸 수 있었습니다." (『숨그네』, 342쪽)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에 나오는 ‘하얀 손수건’은 극한 상황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지탱해 주고 살려준 희망의 손수건이었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손수건 한 장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혹 이 글이 과장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거나, 현실에서 맛보는 슬픔이나 좌절, 낙망 같은 부정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다면, 시간을 내어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 참, 우리나라에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손수건 이야기가 있다. 정채봉 아동문학가는 <만남>이란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손수건 같은 만남이라 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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