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길 7일 차 / 9월 14일(목), 흐림
로그로뇨 ~ 나헤라 / 29.5km, 184.6km
오늘은 그림자 없이 걸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알베르게를 나서 로그로뇨 시내를 벗어나기까지는 한 시간이 걸렸다. 스페인 라 리오하(La Rioja) 지역의 특산품인 포도주 한 잔 맛보지 않고 로그로뇨를 떠나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인구 13만 명이 넘는 큰 도시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시 외곽에 있는 호수를 지나 그라헤라 봉(Alto Grajera)에 다다를 즈음,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서쪽의 검은 구름이 곧 몰려와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카미노를 걸으며 비를 맞는다는 것은 몇 가지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판초 우의를 입을지 말지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것도 번거롭지만, 그보다 심각한 것은 질퍽한 흙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페인 특유의 진흙은 악명이 높다. 흠뻑 젖은 흙이 신발에 쩍쩍 달라붙으면 떼어내기 힘들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며 괴롭히기 일쑤다. 물구덩이를 만나면 풀숲이나 밭으로 우회해야 하고, 때로는 본의 아니게 농작물을 밟고 지나가야 하는 경우마저 생긴다.
잔뜩 흐린 날씨였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그림자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최문규 옮김, 열린 문, 2022년 4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림자를 팔아넘길 만큼 영험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땡볕을 쬐지 않아 체력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로그로뇨 외곽부터 나헤라(Najera)에 이르는 길 좌우로는 거의 대부분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다 올리브 농장이 있는 것 외에는 구릉지마다 까맣게, 혹은 투명하게 익어가는 포도송이들이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리오하(Rioja) 지역이 스페인 포도주의 주산지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얼마 전에 프랑스의 보르도 같은 포도주 주산지에서 포도 농사를 포기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포도주보다 맥주를 더 좋아해서 포도주 소비가 크게 줄고, 그 때문에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다른 작물을 심는 경우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영향인지 이곳에서도 관리가 소홀하거나 아예 버려진 포도밭이 꽤 눈에 띄었다. 버림받은 포도나무는 무성한 잡초들 사이에서 점차 들포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포도는 알 크기도 콩알처럼 작았다. 일부러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 따 먹어 보았지만, 딱딱하고 단맛도 향도 거의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을까. 누군가를 잊어야 하는 일도, 누군가에게 잊히는 일도 모두 슬픈 일이다. 누가 누구를 잊거나 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해도, 버림을 당하는 이의 마음에는 치유하기 힘든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잊기는 하더라도 버리지는 말자.' 이 다짐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가, 지갑 속 사진을 꺼내 보듯 가끔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려 보자.
길에서의 만남은 대개 짧은 스침에 그친다. 불가에서는 옷깃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 하는데, 짧은 스침도 분명 소중한 만남이다. 오늘 길을 걷다가 영국 런던에서 온 모녀를 만났다. 모녀 모두 표정이 유난히 밝았다. 어머니는 런던 교외에서 포도주 농장을 경영한다고 했다. 딸은 샬럿(Charlotte)이라는 이름의 26살 미혼 아가씨로, 무척 밝고 쾌활했다. 샬럿이 내 이름을 물어 가르쳐 주었더니 '장 석 규'라고 또박또박 두 번을 반복했다. 받침 발음이 까다로울 텐데 거의 완벽하게 발음한다며 천재라고 했더니 기뻐했다.
한국인 청년 한 사람도 만났다. 종교가 있냐고 물으니 '무교'라고 대답했다. 그는 유난히 '무교'임을 강조하는 듯했다. 종교적인 동기 없이 어떻게 이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냥 무작정 걷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종교의 쇠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최근 들어 한국에서 더욱 심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가 젊은이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젊은이들을 단순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이끌 방안은 무엇일까. 기독교인 모두가 거듭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젊은 세대가 없는 기독교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