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고픈데 물마저 떨어지고

by 장석규

프리미티보 길 4일 차 / 9월 29일(금), 맑음

캄피에요 ~ 베르두세도 / 27.6km, 누적 거리 565.8km


오늘은 추석날이었다. 집을 떠나 멀리 와 있어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걷기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해발 고도 1,250m나 되는 높은 산을 안전하게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덟 시간 넘도록 걸어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한 나는 일단 휴식부터 해야 했다. 간단히 몸을 씻고 빨래한 뒤 침대에 드러누워 한 시간 동안 꿀잠을 잤다. 힘들기로 치면 내 이번 카미노 일정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날이었다. 메세타에서 종일 비를 맞으며 고생했던 날보다 더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배는 몹시 고팠고, 물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알베르게를 찾아서 1km라도 더 걸어야 했다면 아마 중간에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령 쓰러지더라도 의지로 극복해 내겠지만, 그만큼 내 육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늘의 카미노는 고도 1,200m에서 1,300m에 이르는 고갯길을 연이어 넘나드는 험난한 코스였다. 알베르게를 나서면서부터 중간에 마을도 없고 물을 보충할 만한 곳도 없이 긴 구간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사전 대비가 부족했던 것이 문제였다. 물론 이러한 길의 특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막연히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준비를 소홀히 했던 탓이다.


'내일은 힘든 코스를 걸어야 하니 모처럼 잘 먹어야겠지?' 하는 생각에 어제저녁 내 카미노 처음으로 비프스테이크를 먹어두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침 식사가 너무나 부실했다. 바게트 두 조각과 사과 한 개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기 전 보레스(Borres) 마을에 있는 바르에서 먹을 것을 보충하면 되겠거니 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한 시간 걸려 도착한 그 마을의 유일한 바르는 굳게 닫혀 있었다. 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산길로 들어서야 했다.


보레스를 조금 지나자 갈래길이 나왔다. 짧지만 힘든 오스피탈레스(los Hospitales) 산과 팔로 고개(Puerto del Palo)를 잇는 능선 길, 그리고 조금 더 길지만 걷기 쉬운 폴라 델 알만디(Pola del Almandi)를 지나 베르두세도로 가는 길. 나는 힘들지만 경관이 좋은 능선 길을 택했다. 물은 500cc 페트병으로 두 개를 챙겼다. 하나는 배낭에 넣고 다른 하나는 호주머니에 넣었다. 코스가 긴 만큼 '긴 호흡'을 가져가려고 천천히 걸었다.


모르테라(La Mortera) 마을에 들어섰다. 교회가 있었지만 문이 닫힌 바람에 창살을 부여잡고 가족들과 ○○ 군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추석날인 만큼 가족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산 중턱쯤 올라갔을 때였다. 언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산불이 크게 났던 모양이다. 불에 탄 나무들을 벌목해 내서 산은 온통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능선을 따라 검게 그을린 나무 몇 그루만 외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숲을 이루던 나무들이 베어져 나간 자리에는 울렉스(Ulex)라는 가시덩굴들이 차지했다. 울렉스라는 넝쿨 식물은 특히 산불에 강하다고 하던데, 과연 산을 뒤덮듯 살아나 노란 꽃을 피워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자연의 복원력에 감탄하면서도 숲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은 지울 수 없었다.

22.산불과 울렉스.jpg

몸은 점점 지쳐갔다. 정상을 향해 올라갈수록 멀리 바라보이는 전경은 더욱 멋있어졌다. 이런저런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따라 나는 피로도가 심한데 다른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힘차 보였다. 열두 시가 되어 오스피탈레스(Hospitales) 고갯길 정상에 이르렀다. 순례자들이 몇 그루 소나무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넌지시 다가가 살펴보니 꽤 많은 음식을 준비해 와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미리 배낭에 넣어두었던 치즈 한 조각뿐이었다. 짭조름한 치즈를 먹어서 그런지 물이 더 마시고 싶었다. 갈증을 이기지 못해 마시다 보니 물도 달랑거렸다. '여차하면 다른 순례자에게 물을 얻어 마실 수 있을까. 에이, 산에서는 남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무슨 방법이 생기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만 갖고 나 자신을 다독이며 능선 길을 따라 걸었다.


'라구나 데 라 마르타(Laguna de la Marta)'라는 작은 산정호수를 지나 해발 고도 1,146m인 팔로(Palo) 고갯마루의 하산 구간으로 들어섰다. 오른 만큼 내려가야 하는 것은 자연의 불변의 법칙 아니던가. 한동안 급경사의 좁은 길, 불규칙하기 이를 데 없는 돌길이 이어졌다.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니 오르막길 못지않게 땀이 났다. 긴장해서 솟는 진땀이 이마와 콧등으로 흘러내렸다. 돌을 피해서 걷는다 해도 워낙 돌이 많아 피할 수 없었다. 다리 힘이 풀려서인지 중심이 자꾸 흐트러졌다. 스틱 두 개의 보조가 절대적이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이제 물도 거의 다 떨어졌다. 갈증이 심해지고 있을 즈음 저만치 보이는 산 능선에 작은 지붕이 보였다. 지도 앱을 열어 확인했다. 몬테푸라도(Montefurado)라는 마을이었다. '저기에 가면 물을 구할 수 있겠지?'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집 세 채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어느 집 뒤편에 수도꼭지가 보였다. 사용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셔도 될지 의심하면서도 꼭지를 눌렀더니 물이 쏟아졌다. '아, 살았다.' 하는 속말이 입으로까지 튀어나왔다. 빈 병 두 개에 물을 가득 채웠지만, 허기진 배는 채울 수 없었다. 오늘 역시 멋진 경관과 맑은 공기라는 '만나'는 실컷 먹었건만, 육신의 배는 채우지 못했다. '육신과 마음, 영혼은 별개일 수 있어. 그러니 네 몸 관리도 잘해야 하는 거야.' 나를 책망하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내려오니 공동묘지가 보였다.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증표 아닌가. 반가웠다. 곧 나타난 라고(Lago) 마을은 순례자를 위한 시설이 아무것도 없는 몇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라고를 지나 만난 포장도로가에 이정표가 하나 서 있었다. 'Berducedo 1.8km'. 다른 때 같았으면 단숨에 다다를 거리다. 그런데도 '아직 1.8km를 더 가야 한다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발걸음은 마냥 터벅댔다. 더 갈 힘이 소진되었다고 느껴질 때쯤 베르두세도 마을이 나타나고 알베르게 간판이 보였다. 안내 앱에는 이 마을이 주민 200여 명밖에 안 되는데도 세 개의 알베르게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릴 것 없이 마을 초입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들었다. (숙박비 6유로)


알베르게에 도착해 몸을 씻고 빨래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워 한 시간 동안 꿀잠을 잤다. 힘들기로 치면 이번 카미노 일정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날이었다. 메세타에서 종일 비를 맞으며 고생했던 날보다 더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길 위에서 겪는 모든 순간들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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