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메멘토 모리 그림자

2일 차:2.25 화요일 날씨 흐리다 비 잠깐, 기온 10~17

by 장석규

Guillena ~ Castiloblanco de la Arroyos, 19.5km


기상해서 날씨를 살피고자 바깥으로 나가니 동녘에서는 아침노을이 한창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어제저녁을 먹고 남긴 빵과 하몽, 치즈로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한 시간은 8:30, 시내와 외곽 공장지대를 벗어나는 1시간 동안에 여기저기 죽어 방치된 고양이 사체 5구를 보았다. 눈에 심히 거슬렸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전염병을 옮기나 않을까 하는, 위생에도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아서다.

방치된 고양이 사체를 보며 '메멘토 모리'란 말이 떠올린 건 좀 과한 걸까. 하지만 나도 멀리 집을 나와 떠도는 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면 저 죽은 고양이들처럼 버려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카미노를 걸으며 순례길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돌무덤을 수없이 본 나 또한 100% 안전하게 완주한다는 보장은 없는 게 아닌가. 혹 길에서 쓰러질 경우 아무리 이국 타향이라 해도 존엄성이 있는 인간인데 그냥 버려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고양이처럼 죽어서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죽음 앞에 더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을 만나 나를 소개할 때마다 빼놓지 않은 게 "이번이 세 번째 산티아고 까미노다." 하는 거다. 그 말에는 살짝이라도 교만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어제 세비야를 벗어나는 동안 과달키비르 강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좀 더 짧은 길로 들어서다가 미끄러져서 오른쪽 엉덩이에 생긴 상처 때문에 지금도 좀 쓰라리다. 이 걸 잊어서는 안 되겠다. 초행이란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긴장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 걷자.


기예나 Guillena 시가지를 벗어나 다소 어지럽던 구간을 지나면서는 아주 쾌적한 길이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와는 달리 구름 낀 흐린 날씨가 이어져서 걷기에 그만이었다. 평지를 벗어나도 해발 고도 200미터를 오르내리는 정도에 그치고 좌우로는 참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사잇길을 계속 걸었다. 프렌치 라벤더와 하라 Jara 또는 Rock Rose라는 꽃, 그리고 이름 모를 각종 들꽃들이 활짝 피어서 땀을 흘리며 지나는 길손들을 미소로 위로해 주는 듯도 하였다. 처음 보는 꽃들이 꽤 있어 그런 꽃들을 사진 찍어 구글 검색해도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이 꽃은 길 가에 꽤나 많던 건데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꽃 이름을 모르겠단다. 구글과 네이버 검색도 민들레, 바늘꽃(가우라)으로 나온다. 내가 보기에는 꽃은 '백선' 닮았는데, 줄기는 정말 다르다. 길을 걸으며 힘든 걸 잊는 방법이 주변 자연환경을 관찰하거나 들꽃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사진도 찍고 검색해 이름을 알아보는 거다. 잔뜩 흐린 날이어서 햇빛은 어쩌다 나오는 날씨인데도 겉옷까지 땀에 흥건히 젖었다. 물도 많이 마셨다. 배낭 무게를 줄이고 싶은데 쉽지 않다. 들판이 벌써 녹색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온갖 꽃들이 필 정도로 낮에는 더위를 느끼나 아침저녁으로는 좀 썰렁한 2월의 날씨인지라 옷가지를 버릴 수 없다. 배낭 무게가 8kg이 넘는 것 같다. 좀 더 가볍게 해야 할 텐데...


20km를 걸어서 오늘 여장을 푼 곳은 Castiloblanco de los Arroyos라는 작은 도시의 기부제 알베르게다. 인구 5천여 명의 이 작은 도시는 이름 그대로 온통 하얀 색깔로 칠해진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스 어느 해안도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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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 거의 도착할 즈음 비가 쏟아져서 당황했지만, 속보로 이동 알베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이 좀 들어 보이고 뚱뚱한 순례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접수대 책상 위에 쪽지가 한 장 놓여 있다. "오후 1시에 오픈합니다." 물론 스페인어와 영어로... 시계를 보니 12시 54분이었다.


간단히 씻고 알베르게 식당에서 배낭에 챙겨두었던 빵 한 조각과 치즈, 하몽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점심을 먹었다. 로리아노가 주방에 모카포트가 있는 것을 보고 에스프레소를 내려주겠다고 해서 이탈리아인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셨다. 기예 나를 떠나 이곳에 오는 동안 마을이 하나도 없어서 커피가 고프던 참이었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가져갔던 믹스커피라도 마시려고 물을 끓이고 있던 참이었다.


로리아노와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저녁때 파스게티를 만들어 먹자는 로리아노 제의에 따른 것이었다. 마트 가는 길에 에스프레소를 마시자고 해서 한 잔 했는데, 1.3유로씩 2.6유로를 로리아노가 냈다. 재료 구입은 그가 알아서 하도록 하고 돈은 내가 내기로 하였다. 내일 아침거리 빵 등을 포함해 스파게티 재료는 모두 17.5유로를 내가 내니 그가 와인과 캔 맥주를 추가로 구입했다. 마트 직원들이 3시에 문을 닫아야 한다고 재촉했다. 시에스타가 임박해서 들어간 것이었다. 겨우 물품을 구입해다 놓고 한 시간가량을 쉬고 나니 로리아노가 와서 저녁을 지을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알베르게 주방에서 와인을 한 잔 하며 스파게티를 조리하기 시작한다. 10여 분 동안 토마토소스를 끓이다가 참치를 잘게 부숴 넣고 약불로 더 끓인다. 한쪽에서는 냄비에 물을 끓여 면을 준비한다. 나는 옆에서 눈여겨보기도 하고 보조를 한다. 면 끓이는 물을 조금씩 소스에 부으면서 더 끓여 간을 맞춘다. 면이 다 익었는지 맛보라며 한 가락을 건네준다. 괜찮다고 하니 면을 끓이던 물을 쏟아내고 소스를 면 냄비에 부어 섞는다. 이탈리아노가 만드는 정통(?) 스파게티가 완성된 것이다. 루이스와 클레멘스가 함께 먹어도 충분한 양이었다. 와인을 곁들인다. 클레멘스가 가져온 것까지 2병, 클레멘스 말하길 이걸 다 마시면 내일은 세비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면 나는 곧 한국으로 갈 거다 한 술 더 떠서 돌아가야겠다 하니 박장대소다. 나 혼자 '산타 루치아'를 부르다가 파바로티의 '오 솔레 미오' '네순 도르마' 등 이탈리아 가곡을 유튜브로 들으면서 흥얼댔다. 로리아노가 따라 부르는 게 역시 이탈리아 인 답다. '목동의 노래'와 '아름다운 베르네' 같은 스위스 민요도 불렀다. 내가 한국의 전통 민요로 아리랑을 부르니 함께 친구들이 엄지를 추켜 세우며 박수도 치는 등 모두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내일은 30km 가까이 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출발하자고 하여 일곱 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일곱 시 반에 출발하기로 합의를 했다. '부에나스 노체 Buenas Noches'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각자 취침 위치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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