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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댁 고양이 Jun 07. 2024

사연 없는 사람이 매력 없는 이유(스포)

살인귀 : 각성 <아야츠지 유키토, 1990>

칼로 배를 쑤시고 장기를 먹게 하는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덮고 차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 제목은 <살인귀>. 말 그대로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사람들을 썰고 다니는 내용이다. 결말에 가서 살인귀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 내용은 충격을 금치 못 했다.


'뭐 이 따위 소설이 있지?' 차영은 생각했다.




수요일 오후 서울 변두리의 카페. 회사 설립일을 맞아 혼자 쉬게 된 차영은 남편 심희를 두고 시 외곽으로 나왔다. 책을 잘못 고른 건 실수다. 내용은 구린데 가독성은 얼마나 좋던지 300쪽 남짓한 책을 2시간 만에 독파했다.


책은 반전도 괜찮고, 떡밥도 군데군데 잘 뿌리고 회수도 나름 깔끔한 편이다. 중간중간 개연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벼락이나 텔레파시 등 판타지적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킬링타임용'으로 손색은 없다. 살면서 1번 정도는 봐도 괜찮을 수준.


하지만 문제는 내용. 살인귀 이야기인데 살인귀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살인귀> 속 빌런은 말 그대로 전형적인 살인귀다. 살인을 즐기고 사냥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부류. 실제로 만나본 적도 만나고 싶지도 않지만 영화를 통해 한 번은 접하게 되는 그런 존재.


책이 90년도에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충분이 파격적이고 재있었으리라. 다만 오늘날에는 '전형적인 빌런'은 인기가 없다.


마블 인피니티 사가의 '타노스'를 보고 모두가 매력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타노스가 '사연이 있는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방법은 아주 삐뚤어졌지만 의도 자체는 납득을 할 수 있다. 용서를 할 순 없어도 정상참작 정도는 고민할 여지가 있다는 것.


만약 타노스가 그냥 미친놈이라서 그냥 세상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저 그런 영화로 기억에 남았을 거다. 미친놈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내 옆에도 당신 옆에도. 타노스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겠지.


하지만 마블은 타노스의 서사에 공을 들였고, 그의 상처와 결핍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줬다. 관객들은 타노스의 상처는 나름 이해했고, 그 결과는 영화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사연이 없는 빌런이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사연이 없는, 혹은 내가 그 사연을 잘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남'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친다. 옆의 문장을 읽어도 아무 느낌이 없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죽는다는 건 슬프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냉혈한이기 때문이 아니다.


반면에 우리가 누군가의 사연을 아는 것 만으로 그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어버이날 부모님을 위해 카네이션을 사러가다 음주운전 트럭에 치인 11살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깝다고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기에. 설령 그 아이가 실존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사연이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사연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공감'이라고 부르고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왜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 효과가 있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개념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귀>의 저자 아야츠지 유키토는 매력적인 책을 썼다. 2시간여 만에 독파할 수 있는 책은 흔치 않다.


다만 <살인귀>는 반쪽 짜리다. 아무리 예쁜 여성이나 멋진 남성을 길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곧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이 책도 곧 잊힐 것이기에.




차영은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카페를 둘러본다. 3 테이블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소개팅으로 보이는 남녀가 있다. 풋풋함이 묻어 있는 게 대학생쯤 됐을까?


남자는 짙은 청바지에 깔끔한 파란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머리도 왁스로 세웠다. 여자 쪽은 살색 H라인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베이지색 카디건.


멀찍이서 지켜봐도 서로 어색한 게 느껴진다. 서로를 보다가 이내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까.


남편 심희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심희와 만나면서 그가 연년생인 형이 있는 것과 형과 별로 친하지 않고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했다는 것, 어머님이 감정 표현이 서투셨다는 것, 아버지는 우울증이 있다는 것, 연애를 전혀 못 해봤고 책에서만 배웠다는 것, 99% 'T'라는 것,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많이 울었다는 것, 이따금 연애 소설을 쓴다는 것, 무쇠 프라이팬과 알텐바흐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이제 심희는 차영에게 중요한 사람이 됐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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