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운 내가 해야지

설거지 루틴(32)

by 장수댁 고양이

덜그럭덜그럭. 장수가 설거지를 다 했다며 침대에 뻗어있으면 나는 건조대에 엎어둔 그릇들을 점검한다. 파랗고 낮은 접시 굽다리엔 끈적한 고추기름이, 스텐 채반에는 미끄덩거리는 하얀 거품이 드문드문 묻어있다. 장수는 설거지를 잘 못 한다. 종종.


처음에는 그릇 몇 개만 씻어줬다. 장수가 그 장면을 보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다. 다만 13평 남짓한 집이다. 아무리 졸졸 흐르는 수돗물이라도 20년 된 싱크대에선 폭포수같이 들리는 법. 내가 그릇을 몇 개 씻고 있으면 장수는 기분 나빠한다. 나는 굽다리에 묻은 고추기름이 더 신경 쓰이지만.


물 튀는 소리에 장수가 멋쩍게 나와 말한다. “어머, 고추기름이 묻어있네 헤헷.” 그럼 나는 그새를 못 참고 말한다. “깨끗하게 닦아야지.” 장수도 설거지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초등학교에서 배웠으리라. ‘야~~~ 니가 해라.’ 장수가 속으로 외친다.


그런 문제는 내가 작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나는 집에 있고 장수는 내 용돈을 벌러 나간다. 설거지는 당연히 내 몫이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설거지를 포함한 여러 가사 노동이 익숙하다는 점이다.


초급 간부 생활을 하다 보면 “O 하사, 일로 와봐”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시키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해진다. 물론 중요한 일들은 본인들이 하고 초급 간부, 그중에서도 ‘핫사’가 하는 일은 작업 후 뒷정리나 짐 나르기 등이다. 여기엔 설거지도 포함된다.


부대에서 해 먹는 밥이라는 게 사실 남자들이 모여서 하는 거라 별 볼 일 없다. 가게에서 산 반찬 몇 가지와 김치찌개인 듯 부대찌개인 듯한 라면이 전부다. 먹고 난 그릇에도 빨간 기름 범벅은 덤.


시설이 좀 신식인 곳이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니 설거지가 즐겁다. 다만 내가 일했던 곳은 20년인지 40년인지 하는 전통만큼이나 시설도 오래됐다. 싱크대 위에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웅크리고 있는 사이즈의 온수기가 달려있었고, 누수인 듯 아닌 듯 온수기 바닥 쪽은 항상 촉촉했다. 고참들이 저마다의 동굴에 가 뻗어있는 시간 동안 사무실 주방은 설거지로 한창이다.


설거지 루틴은 이렇다. 먼저는 뜨거운 물이다. 따뜻한 물은 마음까지 데워준다. 찬물이 뜨거워질 때까지 물을 틀어놓고 기다리다가 적당히 보이는 보울에 물을 500ml 받고 세제를 1번 펌핑한다. 수세미를 넣고 휘휘 저으면 고무장갑을 통해 따끈따끈한 기운이 올라오는데 그러면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뜨거운 물로 적셔주면 된다.


모든 그릇을 세제 물로 닦고 헹구는 파와 하나씩 닦고 헹구는 파가 있는데 나는 후자 쪽이다. 세제 물로 닦고 오래 두면 찝찝하기도 하고 가끔 기름 국물이 고여있는 그릇을 닦다가 튀면 또 닦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기 때문. 장수는 시간이 더 걸린다고 전자를 택하지만 뭐든 서두르지 않는 게 좋다.


기름이 남지 않도록 설거지하는 건 의외로 간단하다. 뜨거운 물로 하면 되니까. 거의 모든 접시가 동그랗기에 왼손으로는 접시를 고정하고 수세미를 잡은 오른손으로는 접시를 돌려가며 닦는다. 작은 접시는 1~2바퀴 돌려주면 되고, 큰 접시는 앞면과 뒷면을 따로 돌려가며 닦는다.


깨끗해진 접시가 쌓여간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는. 장수는 그릇을 대충 쌓기에 늘 공간이 부족하지만 둘이서 사는데 그럴 리 없다. 그릇을 비스듬히 세워 겹쳐두면 뜨거운 물에 데워진 그릇이 남아 있는 물기를 뭉근하게 날려주기도 하고 잠시 쉬었다가 바로 선반에 넣기도 편하다.


그리곤 깨끗해진 주방을 만끽한다. 여유가 된다면 차 한 잔 마시면서. 찻잔 위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깨끗한 싱크대를 배경으로 둘 때 좀 더 빛을 발한다.


장수가 생각난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못하는 거야.’


‘아, 하기 싫어 그런가 보다.’


‘ 너그러운 내가 해야지.’


기록이 길이 된다면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