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루틴 (38)
점심 설거지가 끝났다. 이제 도서관으로 떠난다. 도보로 15분, 왕복 30분이다. 뱃속에 그득한 파스타를 소화하기 충분한 시간. 나시 차림에 쪼리를 신고 발걸음을 옮긴다. 햇살은 팔을 적당히 그슬릴 정도. 횡단보도를 하나, 언덕길 골목을 하나 지나면 도서관이 나온다. 도서관이 열든 닫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점심 후에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나를 잘 안다는 건 이런 느낌이지 싶다.
도서관은 초등학생 때부터 많이 갔다. 원주에 하나뿐인 시립도서관이 있었는데 나와 형,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몇 명은 종종 공부하러 갔다. 공부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쉬는 시간 먹었던 육개장 사발면의 감칠맛과 덜 익은 면 특유의 버적한 식감은 여전히 입가에 맴돈다. 연락하는 이들은 없지만 그때가 그리워질 때면 가끔 육개장을 찾는다.
고등학교 기숙사 옆에도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책을 읽은 기억은 없다. 도서관에 앉아 걔를 구경했다. 여러 가지 신기한 잡동사니를 구경시켜 주는 잡지 따위를 펴놓고 여유를 부렸다. 걔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걔를 알고 있다. 뭘 해야 하는지 잘 몰랐고, 그냥 그게 좋았다. 잡지가 질리면 걔가 읽던 책을 기억해 뒀다가 펼쳐봤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학생이 그런 걸 왜 읽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스무 살이 넘어선 갈 일이 없었다. 보고 싶은 책도 없었고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다시 도서관에 가게 된 건 스물여덟쯤. 신문사 근처엔 작은 도서관이 많았고, 마감하기에 도서관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의 텁텁하고 다크한 커피 맛에 혀가 무뎌질 때면 어김없이 도서관을 찾았다. 기자는 원래 공부를 계속해야 하기에 둘러대기도 좋았다. 책을 읽지 않는 선배들도 독서의 중요성은 알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집사를 만나고 난 후엔 데이트 코스가 됐다. 땡땡이 코스라고나 할까. 마감을 마친 기자만큼 한가로운 직업도 없었고, 집사랑 나는 도서관에서 자주 봤다. 적어도 둘이 아는 사람 중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집사도 나도 책을 읽진 않았지만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결혼 후에도 도서관에 자주 갔다. 책을 읽은 건 이때쯤이 아닐까 싶다. 내 글이 쓰고 싶었고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궁금했다. 작법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스테디셀러는 어떻게 썼는지 살펴봤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처음 했던 것도 그때쯤.
시키는 걸 하는 게 늘 익숙했고, 시키지 않은 건 곧 잘 포기하곤 했다. 엄마는 “니 인생은 니가 책임져”라고 했지만, 열아홉에 만난 군대는 내 인생을 거의 책임져줬고, 그 문을 박차고 나온 신문사 울타리조차 수습 시절을 지나면서는 포근하기만 했다. 모든 게 내 책임인 건 맞는데 뭔가 어정쩡하다고나 할까.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 실력은 성장판이 닫혀버린 내 정강이만큼이나 늘지 않는다.
그래도 주에 1~2번은 도서관으로 갔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 소설이나 기시 유스케의 <신세계에서>를 읽으며 취향을 넓혀나갔고,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유> 시리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요즘엔 국내 수필 코너를 뒤적거린다. 추천 도서 대신 제목이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몇 장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빌린다. 이슬아가, 신경숙이, 김욱이 그랬다.
내가 뭘 쓸진 모르지만 아마도 그들을 닮았으리라.
기록이 길이 된다면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