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뭘 쓰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 ‘정신승리’를 다뤄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른 주제가 ‘회피와 해탈의 차이’입니다.
주제는 정했고, 어떤 이야기를 쓰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과거에 도망쳤던 얘기가 나을지, 요즘은 어디서 도망치고 있는지를 쓰려니 글이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쓰면서도 가식이라고 느꼈거든요. 그저 허울 좋게 끄적거리고 있을 뿐이었죠.
그렇게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습니다. 4번쯤 다시 썼을 때였습니다. 평범한 내 얘기를 ‘있어 보이도록’ 편집하는 저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회피(回避)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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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란 무언가를 피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말이죠. 도망간다는 겁니다. 대상과 마주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는 거죠.
글을 쉽게 쓰지 못하는 저를 발견하고 무엇을 포장하고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 돌아봤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글쓰기 모임을 만들고, 주제도 제가 정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글이 잘 안 써져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퇴고는 좋은 글쓰기의 기본이지만, 제가 다시 쓰는 건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아예 새롭게 쓴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렇게 다시 쓴다고 더 좋은 글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지우고 다시 쓰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쓰는 데 급급 했거든요. 쓰고 수정하는 쪽으로 글을 썼었죠.
하지만 요즘에는 일단 초고를 써 놓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A4를 3/4 가까이 채우고 전부 날리는 기분은 씁쓸합니다. 다만 가차 없습니다. 쓰는 데 걸린 시간 때문에 머뭇머뭇할 때도 있습니다만, 결국 날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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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2천 자 정도를 쓰고 지운 적이 있습니다. ‘공감’을 설명하는 글이었는데, 안 그래도 어려운 개념을 꼬아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2 천자면 60줄입니다. 10포인트 글씨로 A4 두쪽은 나올 겁니다.
쓴 글을 아내에게 보여줬습니다. 반응이 영 시원치 않습니다. 뭐라고 말을 하진 않지만 느껴집니다.
반응을 보곤 가차 없이 ‘Delete’ 키를 눌렀습니다. 초반 6줄을 제외하곤 백지가 됐습니다. 쓰는 데만 2시간 걸렸지만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썼습니다. 아내에게 괜찮은 반응이 나올 때까지요.
다행히 지우는 건 한 번이면 족했습니다. 두 번째 글을 본 아내 반응이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꼬아 썼던 부분들을 없애고, 쉽게 쉽게 쓰려고 노력한 부분도 빛을 봤습니다.
그렇게 좋은 반응이 나오니 지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작법서 <퇴고의 힘>에서도 쓰는 작가가 재미없으면 독자는 고역이라고 했거든요.
아마 썼던 게 아까워서 지우지 않고 버텼다면 쓰고도 찝찝한 상황이 이어졌을 겁니다. 기껏 썼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은 거죠. 쓰는 저도 재미없고, 읽는 아내도 독자도 재미없는 글이 나오는 겁니다. 게시물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댓글이 달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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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이 재미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졸작’이 나옵니다. 다만 인정한다면 다시 쓰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게 회피와 해탈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의 차이 말입니다.
회피가 늘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만약 차가 내게 달려오거나, 인상이 험악하고 담배를 입에 문 고등학생, 20분째 쫓아오는 이상한 아저씨 등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회피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만 ‘회피가 문제가 되는 상황’도 분명히 있습니다. 상사의 꼰대질을 참을 수 없는 경우, 친구의 참견이나 애인의 관심이 불편한 경우 등이죠. 회피가 답이 아닐 수 있는 경우입니다. 특히 문제의 원인이 ‘나’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고민해 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회피와 해탈을 구분하기가 편합니다. 글이 재미없으면 재미없게 쓴 사람 잘못이니까요. 물론 취향은 있겠습니다만, 이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책임은 글을 쓴 작가에게 있을 겁니다. 이를 회피하며 독자를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 글이 더 나아지진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