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출근길 정류장에선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출장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별 일 없을 겁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내용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정류장에는 열댓 명이 있습니다. 다만 인사는커녕 서로 아는 척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저도 스마트폰을 봅니다. 볼만한 건 없습니다.
-
오전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연이는 제 양 어깨를 붙잡고 복도 끝으로 데려 갔습니다. 뭐가 궁금한지는 대강 예상됩니다. 다만 이름도 모르는 그와는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매일 아침에 마주친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연이가 가슴을 치며 답답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나연이는 제 연애사만 나오면 민감해집니다.
-
일과가 끝나고 퇴근 시간입니다.
261번 버스에 올라 뒷좌석을 살폈습니다. 자줏빛 구루마와 할머니, 귀에 이어폰을 꽂은 직장인 3명, 스마트폰을 나눠보며 열띤 대화를 나누는 고등학생 커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창밖은 우중충합니다. 볕을 못 본 지 일주일은 된 것 같습니다. 이래서 햇빛을 못 보면 우울해진다고 하는 걸까요. 고등학생 커플은 뭐가 안 맞았던 건지 서로 등을 돌린 채 조용해졌습니다.
눈을 감고 집에서 할 일을 정리해봤습니다.
<연금술사> 필사는 이제 한 달 지났고, 주말마다 5시간 이상을 쏟은 덕에 80% 끝났습니다. 책이 얇아 금방 끝날거라 생각했지만 진행이 더딥니다. 다행이라면 잉크 보는 맛이 있다는 겁니다. 잉크는 이로시주쿠의 ‘죽림’을 사용합니다. 대나무 숲이라는 이름처럼 노트를 볼 때마다 싱그러운 냄새가 납니다. 특히 죽림은 굵은 글씨로 쓰면 짙고 옅은 녹색 농담이 더 뚜렷해집니다. m닙 사길 잘했습니다.
-
버스가 덩컬거려 창문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이 보입니다. 급하게 벨을 누르고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신호가 빨간불이라 버스는 아직 정류장입니다.
카드를 찍고 내리면서 핸드백을 떨어트렸습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핸드백을 뒤집니다. 떨어질 때 소리가 컸고 화장품 파우치 안도 난리가 났습니다. 만년필이 깨졌나 살펴보고 있는데 604번 버스가 왔습니다. 익숙한 실루엣이 내립니다. 그 남자입니다.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만년필인가 봐요. 예쁘네요.”
그가 인사하고 돌아섭니다. 그를 멈춰 세웠습니다.
“저기요.”
“네?”
“아니에요.”
그가 다시 돌아섰습니다.
“저기, 저번에 있잖아요.”
“네?”
“통영 얘기요. 마저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통영 갈 일이 생겨서요.”
“아, 그랬었죠. 기억하고 계셨네요. 언제 가도 좋은 곳이죠. 눌러 살면 조금 지루하겠지만요.”
“시간 괜찮으세요?”
“지금요? 특별히 할 게 있는 건 아닌데…….”
“저번에 살려 줬잖아요. 밥 사요.”
“아, 그랬었죠. 알겠어요. 그땐 경황이 없어 제대로 말도 못 했네요. 감사해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