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사 없이 버스에 오른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변한 건 없습니다. 저는 매일 출근하고 퇴근합니다. 나연이는 여전히 예쁘고 일도 잘합니다. 인사이동은 아직 없습니다.
달라진 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은행도 노랗게 물들었고, 단풍나무도 빨갛게 변했습니다. 바람도 습하지 않고 선선합니다.
나연이에게 남자친구도 생겼습니다. 맞은 편 회사 박 대리라고 합니다. 나연이는 일도 사랑도 잘 챙깁니다. 예쁘면서 실속도 있는 게 부럽습니다.
추석 보너스로 만년필도 샀습니다. 이탈리아 ‘오로라’의 옵티마 365 셀레스트 한정판 m닙입니다. 빙하가 떠오르는 푸른 결정이 매력적입니다. 18k 금닙이라 필기감도 부드럽습니다. 60만원을 웃도는 가격은 흠이지만 이번뿐입니다. 돈은 모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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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50분. 핸드백에 만년필과 화장품 파우치를 챙겨 현관을 나섭니다.
정류장이 가까울 무렵 익숙한 실루엣이 보입니다. 그 남자입니다. 얼굴은 면도도 하고 멀끔했지만 머리가 덥수룩합니다. 복장은 단정한 정장입니다. 아무 일 없었을 겁니다.
그가 웃으며 인사합니다. 시선을 스마트폰으로 옮겼습니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은 메시지함을 확인합니다. 새로 온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와 멀찍이 섰습니다. 버스는 방금 떠나 15분 후에 도착합니다. 그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왜 인사 안 받아줘요?”
“죄송해요. 못 봤나봐요.”
“불편하게 한 게 있나요?”
어쩜 이리도 거침없을까요. 거침없는 사람은 불편합니다. 왜 출근 시간부터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에요. 정말 못 봐서 그랬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미움 받을 짓이라도 한 줄 알았네요.”
이 남자도 제가 못 본 게 아니라는 걸 알 겁니다. 왜 속는 척하는 걸까요? 모를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대놓고 모른척했으니까요. 그가 말했습니다.
“3개월간 지방에 파견 다녀왔어요. 통영에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견학 겸 견습으로 다녀왔죠.”
저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계속했고, 저는 “그러셨군요”라고 답했습니다.
“전에 진주에서 살았거든요. 통영까지는 차로 1시간이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었는데 한 번도 못 갔어요. 마침 기회가 돼서 통영에 갔죠. 정말 좋더라고요. 강릉은 자주 갔는데, 통영은 달라요. 섬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섬끼리 이어주는 작은 다리도 많아 건너다니는 것도 재밌어요. 퇴사하고 통영에서 살면 어떨지 했습니다.”
“아 네. 좋았겠네요…….”
마침 버스가 도착했고, 그는 “다음에 얘기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버스 밖에서도 제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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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나영이와 박 대리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둘이 사귄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저래선 한 소리 들을 겁니다. 저는 나영이를 노려봤고, 나영이는 박 대리를 보내고 달려와 팔짱을 꼈습니다.
“선배, 오늘은 뭐 즐거운 일 있나 봐요. 표정이 좋은데요?”
“아무 일도 없거든, 너 그러다 한 소리 듣는다.”
“조심할게요. 선배 말고는 아무도 그런 소리 안 해요. 세상 사람들은 남 일에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고요.”
“그러는 너는 내 일에는 참 관심이 많네.”
“사랑하는 선배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이런 아부는 어디서 배우는 걸까요. 가르쳐 줘도 저는 못 합니다. 이런 건 타고나야 합니다. 팔짱 끼며 사랑한다고 하는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역시, 그런 건 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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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50분입니다. 짐을 챙기고 있는데 나연이가 부릅니다. 옷차림을 보니 여자들 많은 모임이라도 나가는 모양입니다.
“선배, 261번 버스 타고 가시죠?”
“어떻게 알았니?”
“맨날 보는데 그 정도는 알죠. 저도 그쪽 방향으로 가요. 같이 가요.”
설마 저를 쫓아온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나연이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 홍대로 간다고 합니다. 박 대리는 야근이라고 합니다. 예쁜 애들은 예쁜 애들끼리만 논다고 하는데 누가 모일지 궁금합니다.
전 집으로 갈 겁니다. <연금술사> 필사를 끝내야 합니다. 만년필을 많이 쓰는 방법으로 필사가 좋다는 추천 글을 봤습니다. 어렸을 때 읽은 추억을 떠올리며 서점에서 <연금술사>를 골랐습니다.
이 책을 읽는 건 두 번째입니다. 어렸을 때는 주인공 소년이 저보다 오빠였지만 지금은 제가 훨씬 누나가 됐습니다. 소년은 간절함으로 무언가를 이뤘지만 전 아직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본 기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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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이는 정류장 가는 길 내내 오늘 가는 모임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 5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 중 두 명은 모델이고, 결혼한 사람은 없습니다. 두 명은 게이라고 합니다.
얘기를 5분쯤 듣고 있으니 261번 버스가 왔습니다. 나연이가 먼저 버스에 오릅니다. 버스에 오르는 나연이 발목이 유난히 가냘퍼 보입니다. 굽이 9cm는 되는 검은 가죽 힐입니다. 저런 걸 신으면 30분도 못 걷습니다.
카드를 찍고 자리를 둘러보니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그 남자입니다. 그는 제게 미소 지었고, 저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먼저 자리를 잡은 나연이 눈빛이 초롱초롱해집니다. 나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도 제 비밀을 파헤치기일 겁니다. 자리에 앉으니 나연이가 바싹 붙습니다. 좀 떨어졌으면 좋겠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선배, 저 남자 누구에요?”
“그냥 동네 사람이야.”
“그냥 동네 사람이요? 동네 사람한테 그런 말랑말랑한 표정 짓는 여자가 어디있어요?”
“내가 뭘, 평소랑 똑같거든.”
“아니거든요.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지 처음 알았어요. 회사에서도 그랬으면 벌써 누가 채갔을 거예요.”
“뭐래, 아니거든. 나 좋다는 사람은 지금도 널렸거든?”
“언니, 그러다 평생 혼자 살아요.”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는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나연이는 남자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커지고 저를 언니라고 부릅니다. 나연이도 조심스레 뒤를 돌아봅니다. 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조용히 좀 해.”
“미안해요. 근데 저 남자 이름이 뭐예요?”
“모르겠는데?”
“왜요?”
“그냥 동네 사람이라니까.”
실랑이를 이어가다 보니 내릴 때가 됐습니다. 그가 먼저 내렸고, 제가 따라 내렸습니다. 버스 안에선 나연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절 지켜봅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모릅니다. 물어볼 생각도 못 했습니다. 막 발걸음을 뗀 그를 불러 세웁니다.
“저기요.”
“네?”
“아니에요. 잘못 봤네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는 늘 성큼성큼 걷습니다. 구두를 보니 뒤축이 많이 닳았습니다. 그를 멈출 명분은 없습니다. 그가 멀어져 갑니다. 아니, 가까웠던 적도 없었을 겁니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많이 꼈습니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집까지 가려면 언덕을 올라야 합니다. 가로등은 아까부터 켜졌지만 오늘 유독 어둡고 칙칙합니다.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웠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책상에 필사 중이던 노트와 <연금술사>가 보입니다. 부지런히 쓰면 겨울이 오기 전에는 필사를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쉬기로 합니다. 침대에 누워 구름 낀 하늘을 구경합니다.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