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도착하니 그녀가 자리에 먼저 와 있습니다.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이제는 솔직해야 합니다. 라떼를 주문하고 자리로 향했습니다. 그녀가 저를 봤고 눈인사를 했습니다. 반쯤 마신 라떼 한잔이 그녀 앞에 놓여 있습니다. 자리에 앉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심호흡을 하고 말을 건냅니다.
“비가 오려나 봐요.”
“네, 아까부터 올 것 같았는데 아직이네요.”
“비 오는 날 좋아하세요?”
“글쎄요. 비 오는 날이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서요.”
“저도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가끔 비가 내렸으면 해요.”
“왜요?”
“비가 내리면 공사를 쉬거든요. 아니면 급하게 마무리하죠.”
“그러네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고, 침묵이 흘렀습니다. 제가 먼저 침묵을 깼습니다.
“이제 말 해야겠죠?”
“네? 어떤 얘기요?”
“어제 그때 얘기하기로 했잖아요. 저 구해주신 날.”
“아, 그랬었죠. 맞아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가 라떼를 마시다 흘렸습니다. 저보다 당황한 모양입니다. 그녀가 당황할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사장님이 제 라떼를 가져다주셨습니다. 이제는 얘기해야 합니다.
“어제 얘기해달라고 하셔서 뭐라 말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동안 생각 안 하고 있었거든요. 생각하기 싫었어요. 구질구질하고 추해서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고, 물어봐도 적당히 넘겼어요.
그날, 죽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아무 생각 없었습니다. 사실 우울증이 있어요. 약을 꾸준히 먹으라고 했는데 정신병 때문에 약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비참했습니다. 항상 우울한 것도 아닌데 약을 먹어야 하나 싶기도 했고요.
우울증에 자살 시도라니 아무도 안 믿을 겁니다. 멀쩡하게 생겼잖아요. 저 말이에요. 이런 얘기 하면 다들 농담으로만 생각해요. 상대가 웃어넘기면 저도 웃어넘기게 돼요. 아니어도 할 수 없어요.”
숨을 고르려는 데 그녀가 창밖을 봅니다. 빗소리가 사납습니다. 빗방울이 아까부터 창문을 연신 두드리고 있습니다. 우산은 챙겨오지 않았습니다. 약속 시간이 조금만 늦었어도 비에 다 젖었을 겁니다.
그녀가 다시 저를 바라봅니다. 눈을 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 생긴 지는 반년쯤 됐어요. 사실 전세 사기를 당했거든요. 건설사에 다니는데 전세 사기라니 웃기죠? 쪽팔려서 말도 못 했습니다. 부모님도 아직 모르세요. 아버지는 수상하다고 다른 데 들어가라고 하셨거든요.
신축 빌라라고 좋다고 들어갔는데 호구 잡힌 거죠. 분명히 ‘살던 집에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하셨는데 귓등으로도 안 들었어요. 낡은 집은 싫었거든요. 보증금이 비싸긴 했는데 신축이라 비싸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사기 당했다는 건 뉴스로 알았어요. 공인중개사에게 전화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죽고 싶었어요. 출근해야 빚이라도 갚는데 미칠 것 같았습니다. 이자 부담이 세니까 대출 많이 끼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젠 빚만 2억이에요.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한동안은 회사 숙직실에 몰래 살았어요. 부장님은 열심히 일하는 줄 알 겁니다.
이 동네에는 올해 초에 이사 왔어요. 월셋집이 싸게 나왔거든요. 계약하고 일주일쯤 지났을까요. 아침에 누리끼리한 천장을 보는데 다 끝났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벌어 뭐하나 싶기도 했고요. 그랬어요. 그랬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창밖을 보기도 하고 다시 저를 보기도 했습니다. 놀라거나 불쌍하다는 표정도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과하게 말한 걸까요?
“제가 좀 과했죠?”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옛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희 집도 전세 사기를 당했었거든요. 어릴 때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아요. 힘드셨겠어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