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여름 Jun 16. 2023

1986년 칠성로 서점에서

'응답하라 1986'

칠성로 서점에서


 고등학생 때는 용돈이 없었기 때문에 금지였던 아르바이트를 몰래 해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곤 했다. 그래서 당시에 잡지를 산다는 건 엄청난 사치였다. <NON-NO>라는 잡지책을 갖고 싶었다. 대구역 건너 내리막길엔  야트막한 높이의 중고서점이 여러 개 있었다.  차로옆 인도 쪽에 있었다. 지하차도로 내려가는 길목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태의 삼각형 점포였다.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데 기억이 가물거려 정확히 기록할 재간이 없다> 갖고 싶던 '논노'라는 잡지를 샀다. 생각해 보면  제법 큰 맘을 먹고 샀다. '제주도 식물원'에 관한 책과 'NON-NO'라는  잡지 2권을 사고 오면서 흥얼거렸던 노래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그 거리 그 느낌이 그립다.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 칠성로 서점을 따라갈 수는 없다. 퍽퍽하고 구석지고 후미진 그 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면 칠성로 서점 '삼각점포'는 열일곱의 내게는  케렌시아였다.





잡지를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와 사진이 실려 있다. 몇몇 오래된 잡지를 서점 한 귀퉁이 벽에 기대서 서서 훔쳐봤다. 중고서점이라 몇 달 지난 책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사지 않아도 뭐라 하지 않던 아저씨가 고마웠다. 하지만  흘끔거리며 읽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갖가지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시대에 <NON_NO>에는 알고 싶은 것이 잔뜩 실려 있어서 오만가지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일본의 패션잡지로(아직까지 발행되고 있다) 메이크업하는 방법과 해석하지는 못하지만  만화도 재미있었고 앞서 나가는 패션아이템, 간간이 명품들을 보면서 어릴 적 그런대로의 문화적 에티튜드를 높였다. 어쩔 땐  몇 년 지난 잡지를 사서 오기도 했다. 잡지의 몇 장을 뜯어내어 오린 다음 종이봉투를 만들기도 하고, 동생들의 교과서 커버로 만들기도 했다. 독특한 느낌의 색감과 질감이 너무 좋았었다.


 빛바랜 잡지를 지금도 몇 권 갖고 있다. 몇 차례 이사를 했지만 버리지 않은 건, 페이지를 넘기면 젊은 날의 내가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칠성로 그 거리를  택시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얼마나 변했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변해버려 찾을 수 없었으며, 내가 아는 그곳이 맞나 싶었다.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내내 섭섭했다. 나도 변했는데 변해버린 그 거리와 없어진 상점이 야속했던 걸까? 노포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나의 이기심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쉬운 마음에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을 다녀왔다. 입구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던 책방이 있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우리 글방' 서점이 있었다.  앤티크 한 나무 책장과  근사한 고서가 즐비해 있었다. 1986년에 발행한 이장호의 장편소설 '공포의 외인구단' 상. 하권 사 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여간 근사한 게 아니었다. 아마 카페를 운영했었는지(코로나로 많은 걸 잃게 되었으니 그럴 수 있다.) 근사한 테이블과 멋지게 어울리는 의자가 제법 몇 개씩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지만, 얼마나 근사한 장소였을지 짐작이 간다. 여기저기에 무질서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어쩌면 지적이던 주인의 계획된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지금은 책을 마음껏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옛날 헌 책이 그립다. 그 책 냄새가 그립고 찹찹하던 그 거리가 그립다. 쉰넷의 나는 가끔씩  비 오는 그 예전 칠성로 거리에 서서 있다. 헌책을 사고, 논노를 구하기 위해... 열일곱의 마음으로 여름이가 거기 있었다.


추억할 수 있는 과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건 아련한 첫사랑처럼 마음이 넉넉해 온다. 책 냄새가 좋아서 비가 오면 달려갔던 그 거리 그 책방에 내가 있고, 출근길 비가 오면 만화방이 그리운 나도 지금의 나는 여기에 있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지금은 없지만, 노래가 있어서 그나마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책방들이 없어지고 야트막하게 상점들이 있던 그 특이했던 지하상가도 도시계획에 밀려 사라졌다.     김현식이 없어도 노래로 위안받듯이 책방의 존재 자체에 대해 위로받는다. 작고 큰 책방들이 주위에 있음에 만족해하며 감사한다. 으리으리하게 멋진 서점도 감사하고 동네 꼬맹이들이 다니는 문방구서점도 감사하다. 머지않은 시간에 나도 책방을 해보고 싶다. 누군가에게도 '칠성로 서점'이 되기를 바라면서.     

작가의 이전글 기록의 쓸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