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6'
칠성로 서점에서
고등학생 때는 용돈이 없었기 때문에 금지였던 아르바이트를 몰래 해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곤 했다. 그래서 당시에 잡지를 산다는 건 엄청난 사치였다. <NON-NO>라는 잡지책을 갖고 싶었다. 대구역 건너 내리막길엔 야트막한 높이의 중고서점이 여러 개 있었다. 차로옆 인도 쪽에 있었다. 지하차도로 내려가는 길목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태의 삼각형 점포였다.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데 기억이 가물거려 정확히 기록할 재간이 없다> 갖고 싶던 '논노'라는 잡지를 샀다. 생각해 보면 제법 큰 맘을 먹고 샀다. '제주도 식물원'에 관한 책과 'NON-NO'라는 잡지 2권을 사고 오면서 흥얼거렸던 노래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그 거리 그 느낌이 그립다.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 칠성로 서점을 따라갈 수는 없다. 퍽퍽하고 구석지고 후미진 그 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면 칠성로 서점 '삼각점포'는 열일곱의 내게는 케렌시아였다.
잡지를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와 사진이 실려 있다. 몇몇 오래된 잡지를 서점 한 귀퉁이 벽에 기대서 서서 훔쳐봤다. 중고서점이라 몇 달 지난 책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사지 않아도 뭐라 하지 않던 아저씨가 고마웠다. 하지만 흘끔거리며 읽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갖가지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시대에 <NON_NO>에는 알고 싶은 것이 잔뜩 실려 있어서 오만가지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일본의 패션잡지로(아직까지 발행되고 있다) 메이크업하는 방법과 해석하지는 못하지만 만화도 재미있었고 앞서 나가는 패션아이템, 간간이 명품들을 보면서 어릴 적 그런대로의 문화적 에티튜드를 높였다. 어쩔 땐 몇 년 지난 잡지를 사서 오기도 했다. 잡지의 몇 장을 뜯어내어 오린 다음 종이봉투를 만들기도 하고, 동생들의 교과서 커버로 만들기도 했다. 독특한 느낌의 색감과 질감이 너무 좋았었다.
빛바랜 잡지를 지금도 몇 권 갖고 있다. 몇 차례 이사를 했지만 버리지 않은 건, 페이지를 넘기면 젊은 날의 내가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칠성로 그 거리를 택시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얼마나 변했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변해버려 찾을 수 없었으며, 내가 아는 그곳이 맞나 싶었다.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내내 섭섭했다. 나도 변했는데 변해버린 그 거리와 없어진 상점이 야속했던 걸까? 노포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나의 이기심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쉬운 마음에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을 다녀왔다. 입구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던 책방이 있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우리 글방' 서점이 있었다. 앤티크 한 나무 책장과 근사한 고서가 즐비해 있었다. 1986년에 발행한 이장호의 장편소설 '공포의 외인구단' 상. 하권 사 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여간 근사한 게 아니었다. 아마 카페를 운영했었는지(코로나로 많은 걸 잃게 되었으니 그럴 수 있다.) 근사한 테이블과 멋지게 어울리는 의자가 제법 몇 개씩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지만, 얼마나 근사한 장소였을지 짐작이 간다. 여기저기에 무질서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어쩌면 지적이던 주인의 계획된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지금은 책을 마음껏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옛날 헌 책이 그립다. 그 책 냄새가 그립고 찹찹하던 그 거리가 그립다. 쉰넷의 나는 가끔씩 비 오는 그 예전 칠성로 거리에 서서 있다. 헌책을 사고, 논노를 구하기 위해... 열일곱의 마음으로 여름이가 거기 있었다.
추억할 수 있는 과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건 아련한 첫사랑처럼 마음이 넉넉해 온다. 책 냄새가 좋아서 비가 오면 달려갔던 그 거리 그 책방에 내가 있고, 출근길 비가 오면 만화방이 그리운 나도 지금의 나는 여기에 있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지금은 없지만, 노래가 있어서 그나마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책방들이 없어지고 야트막하게 상점들이 있던 그 특이했던 지하상가도 도시계획에 밀려 사라졌다. 김현식이 없어도 노래로 위안받듯이 책방의 존재 자체에 대해 위로받는다. 작고 큰 책방들이 주위에 있음에 만족해하며 감사한다. 으리으리하게 멋진 서점도 감사하고 동네 꼬맹이들이 다니는 문방구서점도 감사하다. 머지않은 시간에 나도 책방을 해보고 싶다. 누군가에게도 '칠성로 서점'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