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전히 나의 꿈은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누군가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언제나 나의 대답은 '선생님'이었다. 어려서부터 돌보는 것, 나누는 것,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직업이 선생님이라 생각해서 나의 꿈은 자연스럽게 선생님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유아원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 나의 첫 선생님은 시골 동네 유아원 교사였는데, 두 분 선생님께서 서른 명 정도의 꼬꼬마들을 돌봐주셨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지었고, 선생님들은 부모의 역할을 대신했다. 아이를 돌보는 선생님은 엄마처럼 포근하고 따뜻했으며, 풍금 치는 모습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4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선생님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무척 인상적이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 동네에서 농사짓는 어른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어른을 본 게 처음이어서 선생님이 더 커 보이고, 멋져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중학교 1학년때까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왜 꿈이 바뀌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유아원 아이들보다 더 큰 아이인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더 전문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는 수학 과목을 좋아했다. 좋아하자 잘하게 되었고, 수학 선생님께서 칭찬을 자주 해주셨다. 그래서 더 열심히 수학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연세가 많고, 자상한 수학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할아버지'라고 한 번만 불러도 되겠냐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유일하게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과목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수학 선생님을 꿈꾸게 되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선생님'이라는 꿈을 놓아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가장 친한 친구인 M이 저축 부장이었는데, 풍진에 걸려 한 달에 한 번 저축하는 날에 결석했다. 짝꿍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내가 M을 대신하여 저축을 걷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돈이 걸린 문제라 실수를 할까 걱정되어 반 아이들이 저축할 돈을 가져올 때마다 앞자리에 앉은 A에게 금액을 확인시키며 돈을 받고 기록했다.
한 달 뒤, 반 친구 중 하나인 B는 자신의 통장에 금액이 찍히지 않았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다짜고짜 나에게 3만 원 어디 있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가져간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선생님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내 통장에는 평소보다 2만 원이 더 찍혀 있었고, 담임 선생님은 나를 3만 원짜리 도둑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날이 오면 자기도 모르게 남의 물건에 손을 댈 수 있으니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준다는 말씀도 하셨다.
"착실한 선아가 왜 여기 와 있어?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잘못을 할 만한 얘가 아닌데, 여기 와 있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여기서 울고 있냐?"
담임 선생님께서 엄마와 통화하는 사이 나는 교무실 복도에 서 있었다. 지나가던 선생님들께서 울고 있는 나를 보고 한 마디씩 하셨다. 고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는 창피하고, 억울하고, 슬퍼서 눈물만 흘렸다. 그래도 이 시간을 잠깐만 참고 견디면 오해가 풀릴 거라는 기대감이 있어서 서 있을 수 있었다.
"너 때문에 안 써도 되는 3만 원을 쓰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 여자라면 한 번쯤 그럴 수 있어."
굳은 표정을 한 채 교무실에서 나온 선생님은 교실로 가는 복도에서 나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엄마와 통화를 하셨으니 며칠 전 우리 집에 다녀간 외삼촌이 용돈주신 걸 들으셨을 텐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내가 저축을 잘 못 거둬서 3만 원을 분실했으니 나 때문이라는 걸까?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걸음이 늦춰질까 종종걸음으로 쫓아갈 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수학 담당이었던 담임 선생님께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다. 더불어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았고, 수학도 점점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마음도 사라졌다.
나는 선생님이 된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말한다. 교사의 말 한마디에 학생들은 꿈을 발견할 수도 있고, 꿈을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지나가는 말도 가려서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말로 인해 한 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 있으니 이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혹시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아이의 말을 꼭 끝까지 들어보고, 혹시 의심이 가더라고 믿어주라고 부탁한다.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생이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잊고 있던 내 오랜 꿈이 번뜩 생각났다.
'그래!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지? 꼭 학교가 아니어도 아이들을 가르칠 기회는 많을 거야.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선생님이 되었다. 학원으로 출근하는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공부를 해야 했지만, 행복했다. 고등학생 때 수학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학생 때 공부를 제대로 안 했기 때문에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를 읽었어도 풀지 못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문제를 풀다 막히는 부분을 바로 알아낼 수 있어서 기뻤다. 아이들 수준에 맞춰 설명해 주는 게 재미있었다.
고2, 고3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새벽 2시에 시작하는 스터디 모임에 참여했다. 새벽 공부를 마친 후에는 해가 뜨기 전까지 청소년 권장 도서를 읽었다. 아이들을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그만큼 아이들을 가르치고, 소통하는 일이 즐겁고 행복했다. 이 일이 나의 천직이라 느꼈고, 그렇게 믿었다.
결혼 후 반복되는 임신과 유산, 조산으로 인해 가르치는 일을 그만둬야 했을 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다시 할 수는 있을까?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 기다리는 마음만큼 학생들의 인생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학이라는 과목과 선생이라는 직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아직도 관련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이사할 때마다 들고 다닌다. 언젠가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우울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재봉틀을 시작했다. 아이를 낳으면 내 손으로 옷과 장난감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더 열심히 배우게 됐다. 생활에 필요한 소품을 완성할 때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와 비슷한 기쁨과 희열을 느꼈다. 완성품을 가족, 친지,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판매를 할 수 있게 되니 점점 더 재밌었다. 재봉틀 돌리는 시간이 즐거워 잠을 잊고 밤을 새워 완성품을 만들어냈다. 이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직접 만들고 싶은데, 가르쳐 줄 수 있느냐는 문의가 점점 많아졌다. 그래서 엄마들을 상대로 육아용품 만드는 재봉틀과 손바느질 수업을 하게 됐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배운 것을 타인에게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뭐든 사소한 것이라도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내 성장이 타인의 성장까지 도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열심히 배워서 나누고 싶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