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으로 하나 된 너와 나의 사이
내 나이 서른둘, 5년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 당시 20대에 결혼하여 아이들 낳고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마음이 바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고 결혼했기에 늦은 결혼에 후회나 미련은 없었다.
신혼여행은 제주로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외로 갔지만, 나는 한창 제주의 매력에 빠져 수시로 들락날락했던 터라 신혼여행지마저 그곳으로 선택했다. 나 혼자 갔을 때 보았던 아름다운 자연과 느꼈던 감성을 평생 나와 함께할 신랑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신랑은 목적지를 정하면 그곳을 향해 질주하듯 운전하는 게 다였다. 감성과 이성이 부딪히는 상황이었다.
30년 넘도록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성인이 만나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하나로 묶였다. 앞으로 서로 잘 맞춰 살아야지,라는 마음보다 반발심이 먼저 생겼다. 왜 제주도까지 와서 즐기지 못하고, 육지에서 했던 생활 습관대로 하는지 원망하고, 화냈다.
여러 번 유산과 조산을 하며 5년을 기다려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애타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는 내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꿈처럼 온 아이라 태명을 '래몽'이라 지었다. 기다린 시간만큼 애틋한 마음이 컸고, 아이의 모든 것이 소중했다. 조그마한 아이가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고 발달하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삶은 육아로 가득 찼다.
엄마인 나는 몸과 마음을 바쳐 육아에 전념했지만, 신랑은 그렇지 않았다. 주말도 없이 회사에 나가고 밤늦게까지 일했다. '퇴근 시간을 조금만 조정해서 육아를 함께 했으면 좋겠어', '일주일에 하루라도 일찍 들어오면 안 돼?', '당신도 사람인데, 일요일에는 좀 쉬어야지' 등 부탁해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신랑의 회식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두 어깨에 실린 가장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서운한 마음이 생기는 건 나도 막을 길이 없었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형편이 아니어서 오롯이 나 혼자 육아를 독점하며 보낸 시간이 꽤 길었다. 기관의 도움을 받기 전까지는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힘을 기를 수 없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어린이집에 찾아가 울면서 호소했다. 제발 내 아이를 받아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했다. 내 몸과 마음이 괴로우니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루라도 빨리, 잠깐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내 마음이 튼튼해져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애와 결혼, 출산까지 10년 정도 신랑과 함께 했으니 서로에 대해 잘 알고, 다른 부분 중 많은 부분을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가족으로 엮여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가족 간의 관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유지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를 기관에 보내고, 나만의 시간이 약간 주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가족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결혼 전에 이 부분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차고 남들 다하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급급한 생각에 밀려 숙제하듯 해치웠던 게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단 시간에 마음에 꼭 맞게 맞춰 살 수 있겠는가? 건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현실적인 모습을 그려보는 연습을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둘은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평생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서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이 터질 수도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관계의 거리에 완급 조절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 얼마만큼이 적정 거리인지, 거듭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