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운전을 한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아도 괜히 차를 끌고 나가본다. 운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운전을 시작한 후 내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말이 맞다. 나는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덕에 아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8년 전, 나는 광주에서 나주로 이사를 온 후 3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 낯선 곳으로 이사 와서 줄곧 외출을 못한 상황이었다. 첫 임신부터 나를 보아온 산부인과 주치의는 여섯 번째 임신을 확인한 후 무조건 침대에 붙어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중한 내 아이를 지키고 싶었던 나는 의사의 말이 아니었어도 자발적으로 침대와 한 몸인 것처럼 생활했을 것이다.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만 생활한 지 10개월, 드디어 나는 예쁜 아이를 출산했다.
애타게 기다린 아이였지만, 독점 육아는 고되고 힘들었다. 늦깎이 엄마였던 나는 육아가 처음이었고,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없었다. 나주라는 섬에 아이와 달랑 둘이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운전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된 건 나주로 이사 온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외출을 한 적은 손가락, 발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산부인과 정기검진 가는 날, 아이 예방 접종이 있는 날, 시댁 모임이 있는 날, 신랑 회사 사장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날 등 공식적인 날에만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이사를 온 후 시댁은 가까워졌지만, 친정은 택시를 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 친정에 한 번 가려면 몇 번을 고민한 후 바쁜 신랑에게 부탁해야 했다. 신랑에게 아쉬운 소리가 하기 싫어서 참고 참다가 어쩌다 한 번씩 부탁하고는 했다.
내가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운전을 배우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아이가 커갈수록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많은데, 집안에만 있으니 조바심이 났다. 계속 집에서만 지내다가는 내가 우울해 죽을 것 같았다. 섬에 갇혀 사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밝은 곳으로, 자연으로 나가고 싶었다.
2020년 1월,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처음으로 신랑에게 운전 연수를 받았다. 꿈같은 1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바로 아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운전대를 잡아본 것만으로도 기쁨이 넘쳐흘렀다. 이왕 시작했으니 조르고 졸라 운전할 시간을 만들었다.
그 후 집 근처 도로에서 1시간, 담양에서 나주까지 1시간, 주차 연습 등 신랑과 함께 운전 연습을 했다. 그런데 다섯 번의 연습 후 신랑이 바빠져서 도저히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신랑의 한가한 시간을 목메고 기다릴 수 없어 혼자서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면 텅 비는 아파트 주차장과 집 앞 마트 주차장에서 주차 연습을 하고,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외진 도로에서 주행 연습을 했다. 걸어서 아이를 등원시킨 후 집으로 돌아와 운전면허증을 들고 매일 운전 연습을 하러 나갔다.
섬에 갇혀 살던 나에게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던 친구 모임이 두세 달에 한 번쯤 있다. 모두 아이 엄마들이라 시간 맞추기가 힘들고, 오후에는 육아와 아이들 학원 픽업을 해야 하니 모이기가 어려웠다. 특정한 날을 정해 오전 10시쯤 만나서 점심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후 오후 1시쯤에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짧은 힐링의 시간을 갖기 위해 아이를 평소보다 일찍 등원시킨 후, 나주에서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1시간 이상 이동했다. 서둘러도 제시간에 도착하기란 어려웠고, 잠깐 친구들의 얼굴을 본 후 다시 버스 여행을 해야 했다. 모임에 갔다 온 날이면 너무 피곤해서 아이가 하원할 때까지 체력보충을 위해 낮잠을 자고는 했다.
처음으로 직접 운전해서 모임에 간 날은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운전을 하게 되니 시간의 여유가 생겼고, 마음 편하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게 긍정 에너지를 채운 후 미뤄뒀던 오후 일정까지 가볍게 소화하고, 여유롭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운전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또 있다. 아이가 기고, 잡고, 설 때는 집에만 있는 게 괜찮았다. 그런데 아이가 걷고, 뛰기 시작하자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아이라면 좁은 공간에 있는 것보다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한 번 외출을 하면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으려는 게 아이들의 특성이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는 하원 후 2시간 정도를 더 놀이터에서 놀거나 산책했다. 아이는 쑥쑥 자라 호기심이 많아지고, 몸으로 움직이며 놀기를 원했다. 이런 아이와 함께 좁은 집에만 갇혀 있는 건 아이도, 엄마도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운전을 하기 시작한 후, 우리 모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자동차 여행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어제 간 곳을 오늘 또 가기도 하고, 무작정 차를 끌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운전을 시작한 후 아이도, 나도 무척 밝아졌고, 웃음이 많아졌다.
"나는 결혼하고, 10년이 넘도록 친정에 가볼 생각을 못했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꽃다운 나이에 결혼한 엄마는 시집살이가 매워서 친정집에 갈 생각을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 기차 타고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는데, 엄마는 그때를 생각하면 슬프다고 하셨다. 아흔일곱의 연세에 정정하신 외할머니께서 가끔 엄마가 보고 싶다고 전화하신다고 한다.
"혹시 김제까지 운전할 수 있겠어? 아직은 좀 힘들겠지?"
"무슨 소리야. 할 수 있지. 천천히 가면 되니까 괜찮아. 긴 시간 머무르지는 못하지만, 자주는 갈 수 있어."
엄마가 조심스럽게 김제까지 운전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야 하니 외갓집에서 긴 시간 머무를 수는 없지만, 자주는 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 두 번 생각하지 말고, 말씀하시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아이를 등원시킨 후 엄마와 함께 외갓집에 다녀온다. 아침에는 나주에서 담양으로, 담양에서 김제로 운전한다. 그리고 외할머니, 친정엄마, 나 셋이서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의 시간을 갖는다. 아쉬워하시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김제에서 담양으로, 담양에서 나주로 운전을 한다.
운전은 나에게 외할머니와 엄마를 위한 오작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덕분에 효녀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다.
작은 중고차는 매일 나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한다. 소통의 부재로 자존감이 낮았던 나에게 운전은 꿈의 통로였다.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운전을 시작했고, 지갑 속에서 20년 동안 신분증 역할만 했던 운전면허증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하루가 많아졌다. 운전을 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하다.
지금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고,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고, 하는 게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엄마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나를 일어서게 할 만한 것을 꼭 붙잡으라고. 바로 옆에 방금까지 먹던 과자 봉지와 부스러기가 있다면 그것을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길 바란다. 방금 전까지 쓰레기 버리는 것조차 귀찮아서 움직이지 않았던 당신은 쓰레기 버리기에 성공했다.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행복이 별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을 하다 보면 낮았던 자존감은 서서히 올라간다. 당신의 성장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