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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Nov 29. 2017

내 몸 속 어디에 엄마라는 성분이 들어있는 것일까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 까지 “바빠 죽겠네”, “시간이 없어!”를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산다. 1년에 300일 쯤은 그러는 것 같다. ‘이번 일만 끝나면 괜찮을 거야’, ‘요즘 일이 좀 몰려서 그래’라고 말하곤 했지만, 이 나이 쯤 되니 알겠다. 성격이다. 타고 나길 늘 종종걸음 치며 몸도 마음도 분주하게 살도록 타고 났다. 그나마 육아휴직 때나 파업 기간에는 좀 덜 했는데, 파업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 열흘, 나는 다시 숨이 차다.   


나 같이 조급한 인간이 가장 읽기 힘든 종류의 책은 뭘까 생각했다. 시집이다. 지난 몇 년 간 내가 읽은 시집은 한손에 꼽는다. 속뜻을 저자가 정확히 말해 주지 않는 글, 단어들 사이의 공간이 지나치게 많은 장르, 그 여백에 무엇이 있는지 찬찬히 상상하고 느끼고 음미해야 하는 고단한 독서. 그러기엔 내 마음이 너무 바쁘다. 제일 자주, 편하게 읽는 건 비문학이나 에세이이고 그 다음이 단편소설집, 조금 더 큰 마음을 먹으면 장편소설이다. 시집을 사는 일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파업을 끝내고 업무 복귀에 즈음해서, 동네 서점에 갔다가 뭐에 홀린 듯 시집을 하나 샀다. 심보선의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였다.


그들은 우그러진 맥주캔 같은 추억을 가졌다

(<Rubber soul> 중)


라거나,


볕 좋은 이른 봄인데

그에게 구조당하고 싶어 폭설 내리는

내 마음의 알프스

 (<장 보러 가는 길> 중>


라거나


오래전에 나는 죽은 새를 땅에 묻어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다친 새들이 툭하면 내 발치로 다가와 쓰러지곤 하였다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유언들이란 얼마나 귀엽던지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중)


라는 문장들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다. 왜 저 문장들에 밑줄을 긋는지, 왜 저 말들을 기억하고 싶은지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읽으며 마치 물잔을 엎지른 듯이 울컥하고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문득, 시를 읽을 수 있는 속도, 라는 말이 떠올랐다. 회사 다니고 아이 키우고 사람 만나고, 그 와중에 또 하고 싶은 건 많아서 영화도 봐야겠고 책도 읽고 싶으니 내 일상에 시는 참으로 끼어들기 힘들다. 나 같은 사람은 시를 읽는 것도 어려운데, 도대체 시를 '쓰는' 사람의 삶의 호흡이란 어떤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우리 동네의 보석같은 서점 <북바이북>에서 마침 신용목 시인의 작가 번개를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지난 월요일, 부지런히 일을 마치고 서점으로 달려갔다. (일이 언제 끝날지 몰라 미리 예약을 해둘 수가 없었다. 흔한 직장인의 일상이겠지.)


시인은 시집에 있는 걸 포함해 최근에 썼다는 시들까지 몇 편을 낭독해 주었다. 눈으로 읽을 때와 귀로 들을 때, 와 닿는 부분이 달랐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조카에게서 언제 오냐는 문자가 왔다.

그보다도

내 몸속 어디에 삼촌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일까?

 (신용목 <귀가사> 중)


글로 볼 때는 있는 줄도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시인이 "내 몸속 어디에 삼촌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일까?"라고 소리내어 말하는 순간 마치 내가 원래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만 같았다. 내 몸속 어디에 엄마라는 성분이 들어 있기라도 했던 것인지, 어쩜 이렇게 당연하게 나는 아이를 낳고 먹이고 돌보며 정신없이 사는 것일까.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내 몸속 어떤 성분이 주술에 답하듯 호응하며 새어나오는 건 아닐까.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라는 책이 출간되고, 브런치 책 소개 페이지에 넣을 문구가 필요하다기에 고민 끝에 이렇게 적었다.

 

<라디오PD, 읽고 쓰는 걸 좋아하고 술담배를 즐기는 인간, 어떤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두 딸의 엄마. 저 각각의 정체성은 내 안팎에서 자주 충돌한다. 그 충격감에 스스로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써 왔다.>

그 날도 그랬다. 11월27일 월요일 저녁 7시, 나는 시어머님께 애 둘을 맡긴 워킹맘인 동시에 마음의 숨 한 모금이 간절했던 한 피로한 인간이었다. 몇 시간 더 일에 집중하고 싶기도,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와 전혀 다른 우주에 살 것 같은 ‘시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혼을 환기시키고 싶기도 했다. 몇 가지 욕망이 충돌한 끝에 그 날은 제일 효용이 떨어지는 욕망의 목소리를 따랐다. 시집을 잘 읽지도 않는 주제에, 시인을 만나러 갔다. 회사에는 일거리가 있고 집에는 아이 둘이 있는데, 그 날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p.s.

그 날,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 시 한 편이 있는데  신용목 시인의 <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라는 시입니다. 마음같아서는 전문을 나누고 싶은데 저작권 등등이 신경쓰이기도 하고 왠지 시인께 실례일 것 같아 조심스럽네요. 일부만 적어 봅니다. 기회 되시면 꼭 전문을 찾아보시길!


 네 말이 차가워서 아팠던 날이 좋았네

 봄이 오고

 목소리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계절의 골짜기마다 따뜻한 노래는 있고,

 노래가 노래하는 사람을 지우려고 하얗게 태우는 목소리처럼,

 한 나흘쯤 머물다

 고요로부터 고요에까지 공중의 텅 빈 골짜기를 잠깐 날리던 눈발처럼 아침 공터에서 먼저 녹은 자신의 몸속으로 서서히 익사하는 눈사람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었지

 그러나 그건 참 멀다, 고개 들면 당인리발전소 커다란 굴뚝 위로 솟아올라 그대로 멈춰버린 수증기처럼 목소리가 사라진 노래처럼


 - 신용목, <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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