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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sgirrrl Nov 15. 2020

욕망 공황 장애

친구와 헤어지며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본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즐겁다. 이 도시 어딘가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과 설레는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세계를 탐험한다. 나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찾게되는 건 기적같은 일이라서 그런 사람을 발견했을 경우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즐거운 대화. 재미있는 소통. 내가 친구에게 기대하는 전부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아주 먼 거리라도 달려간다. 

친구에 관한 한 나는 전혀 실용적인 입장이 아니다. 어떤 해결을 바라지도 않고 도움을 구할 마음도 없다. 믿을 수 있는 혜안과 지혜를 나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음에 부대끼는 고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친구의 말 한마디가 곤경 극복을 위한 큰 힘이 되곤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해결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사람들은 각자 누군가를 친구라 명명하는 '선'이 있고 기준이 있다. 20대 중반에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업무 중심으로 인연을 맺게 되면서 친구라는 관계는 그 전만큼 내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은 언제든 시간이 맞으면 만날 수 있었고, 아니면 친한 동료끼리 늘 풍부한 대화 거리를 가지고 만나 밤이 새도록 말을 주고 받았다. '친구'라는 관계가 다시 내 중심으로 들어온 건 뉴욕에 와서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또 인연을 맺고 그 관계를 가꾸면서 우정으로 발전했다. 카페, 식당, 술집을 돌아다니며 관심있는 것에 대해 또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예전만큼 자연스럽지 않고, 긴장감마저 생기곤 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대충 알겠거니' 퉁치던 어린 아이의 대화법을 끝내고 생각과 감정을 되도록 오류없이 전달해야 하는, 다소 사무적인 대화법이 필요했다. 학교 친구 아니면 동료 기반 친구로 양분되던 나의 친구 관계에 새로운 개념의 관계가 생성된 셈인데, 업무 보고는 능숙하지만 감정 표현에 미숙한 나는 이 관계에 맞는 대화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도 사회화 문제가 있는 비슷한 또래면 겪고 있을, 관계에 있어 경계 장애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타인과 어디서부터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잘 파악을 못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그런 경우 내가 직업상 잘 하는 기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잘 듣는 것'이었다. 인내가 필요한 일이어도 들어주기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아 듣는 데 최선을 다했지만, 실상 나는 납득이 가지 않는 논리를 들으면 굉장히 격하게 반응하는 타입의 인간이라 그렇게 성공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대화가 잘 통한다고 믿었던 상대와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불편한 시간들이 지속되었다. 


결론적으로, 친구 관계에서 인내는 무모한 시도다. 누군가가 참고 있다면 이미 그 관계는 목적을 잃었다. 그저 친구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관계의 종말을 미루고 있을 뿐. 하지만 이미 참고 있고 균형이 깨지고 불쾌함만 쌓일 때부터 상처는 생겨난다. 지속할 가치가 없는 관계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몇 관계가 끝났다. 관계에 있어 실망한 부분에 대한 지적은 날카로웠다. 친구를 사귀면서 이렇게 시작과 끝이 명료한 경우는 처음이라 슬펐지만 신기하기도 했고 큰 도움도 되었다. 애매하게 관계를 끊는 대신 이렇게 지적을 해주는 것이 그들로서는 그동안의 관계에 대한 최선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의 종말을 경험하며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그게 유지되지 못할 때 대화를 참고 견디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말만 하고 있었다. 남한테 상처 주는 말을 잘 못 하는 성격도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돌려 말하는 걸 잘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타인의 문제를 더 명료하게 말하고 그 후폭풍을 감당하는 게 서로를 위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잘 하는 부분과 못하는 부분이 명확해진 셈인다.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대방을 탓할 게 아니라, 내가 표현을 잘 못했기 때문에 결국 모두 나에게 돌아온 셈이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뉴욕으로 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무엇을 이루고자 이 곳에 왔을까? 나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그 명료하지 못한 욕망과 목적 의식이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서울에서의 삶이 뉴욕에서 연장이 되기를 바랐던 그 애매한 상태. 아주 많이 다른 삶인데도 그저 지속되기를 바라며 에너지를 쏟았던 시간들. 나이가 들고 자신의 한계가 더 잘 보이게 되면서 우울해하고 좌절하는 동안 결국 그 바람 자체가 허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는 이민을 올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올 것이다. 아이를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든가, 세계 무대에서 경력을 쌓고 싶다든가. 나의 목적은 도피에 가까웠으나 일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했고 무대가 바뀌었을 때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나에 대한 기대감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장기 비전이었다. 나는 끈기있게 적응의 지점을 찾는 타입이고 하나씩 성취를 하고 있지만 그 길고긴 여정에 지치는 순간이 많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으로 욕망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으니 이제 내 약점을 모두 패에 쥐고 있는 것같다. 포커 판에서 손에 쥔 패가 더 잘 보이고 이제 전략을 더 세밀하게 세워야 하는 시점이다. 그래서 이제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재점검을 해본다.


40대 중반에 이르러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열정과 의지만 있다면 관계가 지속되던 때가 지났고, 아마 나는 내 또래보다 많이 늦게 이런 점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론. 타인이 가진 컨텐츠에 혹하지 말고 나의 컨텐츠를 더 열심히 쌓을 것.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도움이 아니라 친구가 정말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할 것. 원하는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 이유를 반드시 설명할 것. 관계의 끝을 두려워하지 말고 한계를 인지할 것. 나 또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분명히 공유하고 관계를 유지할 것.   


어떤 관계는 내 능력밖. 그동안 많이 애썼고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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