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나는 정말 내가 아니였네
"뉴욕에 왜 왔어요?"
"사랑을 찾아 왔어요."
뉴욕 어디서든 사람들을 만나면 주고 받는 기본 질의응답이었다. 그때는 '헬조선'이란 말도 없었고, 장강명 작가의 책 <한국이 싫어서>가 출간되기도 전이라 한국의 삶에 대한 나의 복잡다단한 미움이 담긴 의견을 늘어놓으며 공감을 얻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반농담으로 받아치며 로맨티스트가 되는 쪽을 택했다. 사실 큰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Looking for my love'라니 이 얼마나 뉴욕 로맨스 판타지같은 문구인가!
하지만 다음 질문에 답을 하는 건 힘겨웠다.
"뉴욕에서 뭐 하세요?"
한국에서 해온 기자 일을 뉴욕에서도 간간이 하고 있었다. 고마운 지인들 덕분에 수시로 할리우드 감독과 배우들, 혹은 유명 뮤지션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기사로 송고했다. 먹고 살만큼의 원고료를 받진 못했지만 도시가 바뀌어도 내 일을 계속 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심리적 안전망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아주 당당하게 "영화와 음악 취재를 합니다"라고 답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영화의 인터네셔널 프레스 투어에 가면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하는 다른 나라 출신 기자들도 생겼다. 멋진 호텔에서, 멋진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니 나쁘지 않군, 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처럼 여기서도 역시나 좋게 평가해줄 수 없는 영화도 많았지만 할리우드 분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너무도 신선한 경험이었기에 그 경험 자체는 즐거웠다. 문제는 돈이 안 될 뿐더러, 영화 잡지판 자체가 힘겹기 때문에 수요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했다. 프레스 투어에 갈 때마다 (아마도 매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사라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시점에서 긍정적적이고 고무적인 사람이라면 기자 커리어를 발판 삼아 새로운 컨텐츠 사업에 나서든가, 아니면 알량한 자긍심따위는 벗어 던지고 좀더 발전적인 업계로 이동하는 게 맞는 행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이 일을 버릴 용기가 없었다. 대신 전혀 다른 분야에서 파트타임 일을 구해 생계를 꾸렸다. 점점 "뉴욕에서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뭐라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진지하게 뉴욕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이 질문은 이 타국 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통했다. 대답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처음에는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분석에 들어갔다. 비슷한 또래의 남들은 잘 살고 있는 것같은데 나만 잘못된 것 같았다. 뉴욕에 괜히 왔나? 집이 가난해서 인가? 결혼을 해서인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가? 애초에 다른 길을 택했어야 하나? 간단한 질문 같아 보이지만 답을 찾기 위해선 인생 전체를 흔들어야만 했다. 살 길은 안 찾고 내 인생을 뒤돌아보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뜯어보는 게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뜯어볼수록 내가 이렇게 스스로를 해체한 후 재조립을 하면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만큼 가능성을 가진 인간인가 의심이 생겼다. 학교를 갈까? 그런데 무엇을 공부할 건데?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거야? 질문을 할수록 갑자기 10대로 돌아가 어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참담한 자기 분석의 나날을 계속되었다. 나는 가진 것 없는 싱글맘의 아이로 태어나 입양을 보낼 수도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었다. 존재의 쓸모있음을 인정받기 위해선 공부를 잘 해야만 했고 다행히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서사가 나의 신탁이라며 드라마 속에서 살았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땐 한창 엑스 세대 마케팅이 청춘의 세상을 휘어잡고 있었다. '나는 남들과 달라' '나는 나'라는 선언들이 장사 전략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 세대를 위한 소비 주문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머리속에 달라붙어 있었던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의 내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화와 음악을 꿰고 있는 사람. 내 멋대로 옷을 잘 입는 사람. 춤을 잘 추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사람. 권력에 주눅들지 않는 사람. 기존 여자 관념에 맞지 않는 사람. 술을 잘 마시는 사람. 담배를 잘 피우는 사람. 잘 노는 사람. 남자들과 있어도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 정답을 빨리 찾는 사람. (왜 돈을 잘 버는 사람은 없었나, 왜! 왜! 왜!)
타인이 지적하는 나의 문제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 제 말을 우기는 사람. 건방진 사람. 잘난척하는 사람. 말을 막 하는 사람. 목소리가 큰 사람. 술주정을 하는 사람. 노래 실력이 별로인 사람. 막춤을 추는 사람. 실수를 하는 사람. 길을 못 찾는 사람. 꼼꼼하지 못한 사람. 제가 좋아하는 것만 잘 아는 사람.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
나는 무의식적으로 타인들과 불행 배틀을 하고 있었고 웬만해선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없는데 그 와중에 또 이렇게 똑똑하기도 쉽지 않다며 내 모든 오만과 무지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단점을 감추기 위해 장점을 악착같이 지키며 그것만이 나라고 외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 바보같은 내 모습을 본 따뜻한 지인이 나에게 조언을 던졌다.
"너의 안 좋은 점도 너야. 인정을 해야 해. 너를 받아들여."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 그건 고쳐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지인의 애정어린 조언이 더해졌다.
"물론 나쁜 점들을 고치면 좋겠지. 하지만 네 단점이 드러난다고 해서 사람들이 너를 안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런 단점들이 나온다고 해도 너는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자신감을 가져."
정말이야? 내 어둡고 멍청한 단점들을 드러나도 사람들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손가락질을 할 그 사람들이 누군데? 결국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진심을 담아 나를 걱정하고 격려해 준 뉴욕의 친구들 덕분에 드디어 나를 나로 인정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언제나 세상의 기준과 맞지 않았고 별나고 4차원이라고 평가되곤 했던 내가 결국 나로구나. 화를 잘 내는 것도 나고 잘 웃는 것도 나고 똑똑한 것도 나고 멍청한 것도 나로구나. 나도 그렇고 인간은 논리적인 한 줄로 설명될 수가 없는 존재로구나. 나를 인정하니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여유가 생겼다. "재는 왜 저래? 바보같아."라고 내 기준으로 단정짓던 사람에 대한 평가에 종지부를 찍은 때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매일 강조하는 '나를 판단하지 말아줘(don't judge me)'가 이런 거구나.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누군가도 그렇고 실수를 할 때도 있고 판단을 잘못할 때도 있는데 그걸 타인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게 아니구나. 결국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이 나를 가둔 셈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나를 남들도 함께 사랑해줄 수 있을 부분만 선택적으로만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지 못한 부분은 내가 아니고 다 남 때문에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죄책감의 영역으로 남겨둔 채 무시하고 방치하고 있었다.
인정을 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판단이 단순해졌다. 능력과 한계가 명확해지니 어떤 일을 할 경우 내가 어떤 힘겨움을 겪게 될지 예상이 되고 위기 관리가 되기 시작했다. 또 내 단점 때문에 타인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이 좀 먹었다고 '엣헴'하며 다 컷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게임 종료다. 내가 나를 다 아는 데에만 아마 평생의 시간이 걸릴 것같다. 나를 공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다. 아이구 인생아, 인정이다, 인정!
뉴욕에 와서 길을 잃었다. 그런데 길을 찾을 수 있을만큼 성장을 하고 있다. 희망이 보인다.
물론 돈을 버는 길은 아직 안개에 휩싸여 있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