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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sgirrrl Apr 11. 2021

자책과 남탓의 순환에서 벗어나기

40대에 버려야 할 두 가지 자세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어렸을 때 꿈꿨던 어른의 이미지와 현재의 내 모습이 꽤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자라서 되고 싶은 구체적인 어른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 결혼을 안 하고 일에서 성공했고, 친구 결혼식에 당당하게 청바지를 입고가는 긴 생머리의 여자.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어이가 없는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이 이미지는 당시 내가 반면교사로 삼았던 어른들의 모습을 반대로 돌리는 한편 미디어를 통해 동경했던 모던 여성의 이미지를 겹친 결과였다. 동네 아줌마들의 비슷한 파마 머리가 지겨웠고, 몸매를 감추는 펑퍼짐한 원피스가 싫었다.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지만 사무실에서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일을 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커리어 우먼'이라는 말이 신조어로 떠오르던 시절, 초등학생은 TV 광고에서나 등장하는 자유로운 여자들을 동경했다.    


꿈꿨던 어른의 모습을 지녀야 했을 나이를 훌쩍 넘기고 나니 그런 꿈을 꾸었던 어린 나에게 미안해졌다. 여전히 일은 하고 있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갑자기 자책의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어그러진 거야? 왜 이렇게 인생이 막 굴러가고 있는 거지? 대체 내가 내 삶의 핸들을 붙잡고 있긴 한 건가?


동시에 내가 '평행우주 비교'라고 부르는 멀티버스 자책감의 굴레가 시작되었다. 내가 한국에 계속 머물렀다면 더 높은 연봉을 받고 더 좋은 자리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좀더 많은 걸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평행우주를 상상하며 지금 현재의 나를 질책하는 셈인데 어디서도 어떤 답도 찾을 수는 없다. 나의 커리어 블록이 위를 향해 차곡차곡 쌓아지고 있기보다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고 그 블록 크기도 작아져서 아무리 쌓은다 한들 저 높은 곳까지 갈 수 없을 것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면 각종 사람들을 비난하게 된다. 나를 미국에 오게 만든 사람이나, 내가 한국에서 버티지 못한 요인들 모두 비난의 대상이다. 가깝게는 남편과 부모부터 뿌리깊은 여성 차별과 계급 문제까지 두루두루 비난의 영역을 훑게 된다. 일종의 비난의 회전문이 작동을 하는데, 그 회전문이 인생에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만들고 싶다면 그 미움을 미친년처럼 발산하기보다 미움의 뿌리를 더 깊게 들여다 보고 내가 어떤 사회/문화적 컨텐스트에 놓여 있었나 되돌아봐야 한다. 그러다보니 내 경우엔 모처럼 내 머릿속에서 2000년에 멈춰 있었던 페미니즘과 계급 문제를 업데이트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탓, 정부탓, 구조탓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니라 나란 개인이 어떤 흐름을 통과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하고 있나 주목을 하며 내 중년 불안 문제를 좀더 심사숙고하게 된 것이다. 이를 테면 내 세대에 대한 생각을 좀더 확장하게 되었다. 이제는 기득권이 된 엑스 세대, 이들은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중년이 되고 있나. 여자들이 대학에 갑자기 많이 진학한 세대였는데 이들은 어떻게 좌절하고 목소리를 잃었는가 하는 지점 말이다.     

그런 한편 내가 상상하는 평행우주가 과연 최선이었을까? 어떤 매체의 편집장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편집장이라는 위치는 위에서 쪼이고 광고주에게 쪼이는 위치인데? 여자가 편집장이 되는 경우는 그나마 실력자가 적은 연봉을 받고 현상 유지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경우일 텐데? (현실은 다릅니다. 이건 나의 자격지심에 의한 상상임을 밝힘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의 이 길을 선택할 때 내가 충동적으로 했을까? 미국에 가야겠다 결심했을 때 사대주의에 빠져서 멋대로 움직인 걸까? 그렇지 않아. 정확하게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내 경험의 데이터를 충분히 분석하고 재고하고 내린 결정이었어. 더군다나 붙어있으면 싸우기만 했던 엄마와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는 바람에 둘의 관계가 나아졌는 걸. 적어도 엄마와의 관계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왜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 이렇게 무력할까. 일차적으로는 내가 이민자이기 때문이야. 그것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오지 않은 다소 도피성 이민지였기 때문이지. 한 3년은 영주권 때문에 별다른 자유가 없었고 그 사이 경력에 공백이 생겼어. 영어를 한국어만큼 고차원으로 구사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에 이력서 통과도 쉽지 않잖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이제 화살은 다시 나에게 향한다. 미국 와서 더 커리어가 단단해지고 연봉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은데 나는 왜 못 했을까? 학교에 가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뭐라도 공부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자책에 대한 또다른 반격. 이봐, 쉽지 않았어. 나는 학비를 충당할 여유가 없었잖아. 억척같이 무언가를 했을 수도 있지만 내 성격이 그리 억척스럽지 않은 걸. 자, 이제 또 자책과 돈 없는 부모 탓을 하게 되고 자책과 남탓과 변명의 사이클에 빠져들게 된다. 

가족을 변명과 비난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그들을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 너무 힘겨워진다. 혼자만 잘 나가는 남편에게 질투를 느꼈던 적이 있다. 잘 살고 있는 모두가 미워지려고 했다. 그리고 그 미움은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제일 미웠다. 

이 어둠의 터널 속 방황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했던 차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이런 내 상태가 과연 우울증인지 아니면 노화의 과정인지 혼란스러워서 객관적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결론은 우울증은 아니었다. 화가 나는 부분을 명확하게 적시하지 않는 데다, 모든 책임을 혼자 껴안고 사는 태도가 문제였다. 그러니까 태도를 바꿔야만 이 중년 진입의 터널에서 빛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공감에 능한 지인은 스스로에게 그만 책임을 물으라고 했다.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만 자신을 다독여주라 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나를 다독일 수 있는지 몰랐지만 일단 더 잘해야 한다고 호되게 구는 내부의 채찍질을 내려놓기로 했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잘못과 실패의 원인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왔고 어떤 현명한 선택을 해왔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빚도 안 지고 잘 살아남았고 인생을 즐기고 살고 있는 건 사실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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