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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sgirrrl Jan 16. 2023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려온 중년의 어느 날

대니얼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벌린은 곧 마감하는 세금 보고 서류를 어서 마무리지어야 한다. 세탁소 손님들 대상의 설날 파티도 준비해야 하고, 모처럼 자신을 방문한 아빠를 위해 국수도 삶아야 한다. 세탁소의 진상 손님을 응대하고 픽업 세탁물을 찾는 등 매일 해야 하는 세탁소 관리도 그녀의 몫이다. 명절을 맞이해 모처럼 집에 돌아온 딸은 눈치도 없이 여자 애인을 데리고 와서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람만 좋은 대충주의 남편은 이 어수선한 날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재미있다며 눈 스티커를 사방에 붙여놔 일만 더 만든다. 모든 일은 한꺼번에 닥치고 스트레스는 제곱으로 늘어난다. 이런, 늦기 전에 세무서에 가야 한다. 


에벌린의 상황은 어느 중년 여성의 웍더글덕더글한 하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육, 일, 가사, 부모 뒷바라지 모든 게 뒤섞여 하루가 흘러간다. 중년 삶은 이 모든 할 일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도록 관리하며 사는 삶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몰리는 때가 있다. 동시에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과 허무감을 깨울 때가 있다. 세무서를 방문한 에벌린이 인종차별을 당해도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모멸감을 느낄 새도 없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하며 자신을 추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허허실실 남편이 심상치 않다.


갑자기 자신이 다른 평행 우주에서 왔다며 촌스러운 복대를 풀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경호원 무리를 제압하는 무술 고수로 변신한다. 립밤을 가지고 다니는 꽁생원스러운 이민자 아시아 남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무협 영화의 무술 영웅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대체된다. 쿵푸를 일상에 녹여 넣는 기발한 장면을 쉴 새 없이 선보였던 위대한 감독님이 생각나지 않는가? 바로 '소림축구'와 '쿵푸허슬'의 주성치 감독 말이다.

에벌린은 남편이 앞장서서 자신을 지키는 상황을 목도하며 그의 허황된 멀티버스 이론에 속지 않고 정신을 추스르지만, 결국 신발을 거꾸로 신으며 다른 차원으로 빠져든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거짓 같은 가상현실을 파괴하고 현실을 되찾아 오는 초창기 인터넷 시기의 혁명 전사였다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에벌린은 현실의 자신에서 벗어나 인생의 수많은 경우의 수를 경험하고 득도하는 소셜 네트워킹 시대(사방의 눈들이 존재하는 그런 시대)의 멘탈 관리 선구자이다. 네오는 현실 안과 밖을 오가지만 에벌린은 자신의 우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멀티버스 내 우주를 재빨리 돌면서 필요한 기술을 가져와 마치 게임 아이템처럼 사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에벌린은 영수증 하나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세무서에서 벗어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인생을 잠시나마 목격하게 된다. 중년 여성의 가장 전통적인 의문 중 하나일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커리어를 쌓았더라면?'의 대답이 멀티버스 중심에 놓인다. 게다가 에벌린은 이민자이기 때문에 '내가 미국으로 오지 않았다면?'이 이 우주와 현실의 간격을 더 벌려 놓는다. 남편과 헤어지고 홍콩에서 무술을 연마한 에벌린은 세상이 추앙하는 유명 배우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못했던 '왕가위 스타일의' 후회를 지니고 산다. 

'세탁소를 하지 않았다면' 되었을지도 모르는 샌드위치맨과 히바치 요리사의 우주도 존재한다. 손과 발이 소시지로 된 세상에서는 그녀도 딸처럼 여자를 사랑하고 더군다나 저 불친절한 세무서 직원과 연인 관계다.


그런데 다른 우주의 에벌린과 달리 현실의 에벌린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 있다. 바로 멀티버스 악당으로 변한 딸이다. 이 모든 가정법,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이 이뤄진 우주에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딸이 존재하지 않는다. 딸이 태어난 뒤 우주가 확 뒤집어져 돌 같은 존재가 되는 우주가 존재한다 해도 그녀와 딸은 여전히 존재하고 티격태격 소통이 가능하다.


악당 조부 타바키는 에벌린의 딸 조이와는 다소 다르다. 평행우주 점핑의 천재였던 조부 타바키를 엄마 알파 에벌린이 극심하게 밀어붙인 끝에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게 되었고 공허함이 그를 지배한다. '에브리씽 베이글'의 수많은 토핑처럼 엄마의 기대에 맞춰 최대의 노력을 쏟아부었는데 베이글이 아닌 베이글 구멍처럼 느끼는 조부 타마키를 보며 에벌린은 조이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 실망한 자신을 반추하고 알파 에벌린을 대신해 엄마 입장을 해명하려 한다. 에벌린의 멀티버스 모험은 반대와 거부와 의심대신 포용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 자신이 상상치도 못했던 세탁소를 운영하며 세무서에 제출할 서류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자신의 인생에도 얼마나 반짝이던 순간들이 많았던가. 잠깐 경험한 다른 유니버스보다 자신이 엄마로 성장하며 경험한 현실의 기억이 다시 에벌린에게 현실 감각을 불어넣는다. 

사랑과 친절, 다정함을 되찾은 에벌린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함께 설날 파티를 보낸다.


이는 내 평행우주의 (혹은 나였을 수도 있을 남의) 인스타그램을 넘기며 부러워해도 내가 주도하는 현실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포스트-팬데믹 시대의 성찰이자 갑자기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붕괴되어 버리는 한 중년 여성의 느닷없이 평행우주를 모험하며 얻은 교훈이다. 


엄마가 편찮으실 때 우연히 영화를 다시 한번 봤다가 딸 측면에서 다른 감상을 되새기기도 했다. 내 인생이 어떤 선택지를 놓고 갈라졌다 해도 내 우주의 출발은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부터. 엄마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를 낳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거기에서 내 존재가 출발했다. 우리의 우주에는 우리가 늘 함께 한다.


결국 엄마와 이 현실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 

몇십 년을 싸웠던 사이지만, 이제는 엄마도 나도 파이팅.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스 #에에올윈 #Everythingeverywhereallatonce #EEAAO #중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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