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원숭이 자세 하누만 아사나
퇴사. 모든 직장인들이 가슴에 품고 사는 단어.
지금 회사에서의 입사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날이었다. 울고, 웃고, 불안한 사건 사고의 연속이기도 했다.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적절했을 것이다.
내 인생을 책임지고 싶었기에 최선을 다했다. 어느 순간 내가 곪아가는 모습은 외면한 채 그저 이렇게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이 정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모든 종류의 이별은 진짜 끝이 왔을 때에 나도 모르는 단호함이 나온다는 것을 퇴사를 통보하며 깨달았다.
어디서 비어져 나온 용기였는지는 모르겠다. 이곳에서 슬퍼하며 아침을 힘겹게 맞이하고,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이 고통스러워질 시기 즈음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유 있게 늦잠을 자고, 밀린 옷장 정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싶었다. 큰맘 먹고 산 베스파를 타고, 아침저녁 선선한 공기를 맞으며 때로는 요가를 가고, 때로는 예쁜 카페에서 책을 보며 사색에 잠기고, 글을 쓰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해보고 싶었다. 배를 조금 곯는 것은 상관 없었다. 나의 삶에 대한 궁핍은 물리적인 섭취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퇴사를 고했다. 내 첫 직장생활이 시작된 9/1에 나는 네 번째 회사에 이별하겠노라 선언했다. 20대의 나와 30대의 내가 퇴사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확연히 달랐다. 불안보다는 설렘이 앞섰고 무엇보다 공백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나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소 복닥한 마음으로 요가원에 갔다. 빈야사는 언제나 나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니까.
오늘의 피크 포즈인 하누만 아사나로 가기 위해 햄스트링과 장요근을 열고 정렬을 곧게 세우는데 필요한 척추와 가슴을 드는 힘. 복부까지 쉴 틈 없이 단련하다 보면 어느새 아사나를 맞이할 시간이 다가오고야 만다. 나는 2년 전의 햄스트링 부상으로 양쪽의 균형이 꽤나 안 맞고 골반 정렬도 틀어져 있어서 당연히 블록 두 개를 챙겨 왔는데. 뜻밖에도 자세가 근접하게 완성되었다. 완벽하게 치골이 땅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버티는 것도 아닌. 묘하게 불편하고 생소하지만 이완할수록 늘어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불안하고 불안정했던 마음의 가장 큰 짐을 덜어냈더니 아사나의 균형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틀어졌던 건 내 육체가 아니라 일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불균형을 맞추려고 이완했더니 육체의 이완이 일어났다. 완벽한 아사나는 아니었지만 마음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시작했고, 불안과 초조를 잠시 잊기 위해 시작했던 요가. 이젠 역으로 요가적 마인드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감각 철수."
수련 전에 느꼈던 더러움이 스스로 물러난 것 같았다. 내가 갖고 있던 분노가 그 분노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와서 수련을 마친 후의 나의 의식과 닮아가며 평화로워진 상태.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분노 그 자체를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감정을 희석시키는 정화로서의 수련이었다.
대상이 없는 분노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건 감정의 원형에 가까웠다. 다른 어떤 감정으로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때 중요한 건 오로지 나였다.
<단정한 실패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