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열다섯 번째 단어: 선물
<마음 한 스푼> by. 040
어느 날 엄마가 카카오톡 선물하기 기능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기능이 세상에 없던 때보다 선물은 가벼워졌고 마음은 부재하지 않냐고. 너무 쉽게 선물 주는 게 가끔은 좀 쓸쓸하다고 했다. 습관성 선물피플인 나는 그 기능을 일주일에 몇 번이고 사용하기 때문에 그저 편하다는 생각이었다. '내 커피값 한 잔 아껴서 선물하면 그걸로 좋은 건 아닌가?' “그래도 편하고 서로 기분 좋잖아~”라고 말하곤 괜히 선물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타인과 주고받은 크고 작은 선물들... 아마 수백 개는 될 텐데, 그 선물이 뭐였는지 왜 기억이 안 나지? 내가 뭘 받았더라, 내가 뭘 사줬더라...
확실히 카카오톡 선물하기가 여느 백화점 못지않게 커진 후 나의 선물 역사는 바뀌었다. 선물이 전에 없이 쉬워진 세상. 물론 이를 통해 못다 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기도 하다. 간편해진 기능의 덕을 본 적도 많다. 그러나 마음을 전하기 어렵고 귀찮고 부담스러워서 커피 한 잔으로 퉁 친 날이 있다. 분명히 있다.
얼마 전 방청소를 했다. 곧 집이 공사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참에 안 쓰는 물건을 가차 없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방에 있는 물건 중 반 이상은 버려야 했다. 굳이 굳이 모았던 온갖 브로마이드, 포스터를 시작으로 언제 샀는지 모를 소품과 매 시험기간마다 사 모은 (=반의 반도 못 쓴) 노트들을 눈 꼭 감고 정리했다. 맥시멀리스트로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순간...(지구야 미안해) 온갖 잡동사니 사이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편지도 이제는 정리해야 했다.
아주 예전, 그니까 10년도 전에 받은 편지부터 바로 전주에 받은 편지까지 하나하나 펴보았다. '게 중에 몇 개는 정리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편지 더미 속으로 스르륵 빠져들었다. 접힌 종이 틈 사이에 가득한 활자들을 읽으며 설렘과 부끄러움, 미안함과 고마움, 서운함과 애석함을 곱씹었다.
쌓인 편지들을 크기에 맞게, 시기에 맞게 정리해놓고 보니 상자 하나가 가득 찼다. 그때 어떤 물건을 받았는지 미안하지만 다는 기억나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뭘 줬는지도 어렴풋하다. '물질이 사라진 곳에 남는 건 형체 없는 마음뿐이네.' 작은 상자에 도무지 담을 수 없는 마음들이 새삼 고마웠다. 글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귀하지. 연기처럼 사라지는 말과 달리 종이가 빛바래는 그 날까지, 글은 그곳에 있다.
'사랑하는 040에게'라며 편지를 시작해준 친구 덕분에 내 사랑은 더 넓은 무언가가 되었고
'네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한참을 말해도 부족할 거야'라고 말해준 친구 덕분에 나는 오늘이 좋았고 내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의 시간과 노력을 부정당하는 것 같았어. 그치만 마음은 주는 사람이 아닌 받는 사람의 쪽에서 충분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 너의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라고 말해준 엄마 덕분에 무너져 내린 줄 알았던 세상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화려한 선물 사이 꼬깃꼬깃 끼어있던 낱장의 편지들.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낸 글로 마음 한 스푼. 선물보다도 오래도록 남은 건 이런 것이다. 이 마음들이 모여 내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선물이 쉬워진 오늘엔 이런 라스트 터치가 어렵다. 예전엔 나도 참 많은 편지를 썼는데 크면 클수록 쉽지 않다. 예전과 같은 양을 쓰는데도 지금의 편지가 훨씬 어렵다. 말 안 해도 알아줄 것 같아서, 오글거려서, 바빠서... 온갖 핑계만 늘어진다. 선물의 가격대만 올라가고, 괜히 겉포장만 휘황찬란해졌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글로 마음을 전하는 것은 가끔 필요 이상의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플러스알파의 것들로 이루어졌으니까. 그런 것들이 없이 살아내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다. 어찌 됐든 나는 또 누군가에게 쉬운 위로와 감사와 또 사과를 건네겠지. 그래도 마음을 한 스푼 얹는 일의 귀함을 잃지 말자. 당시엔 낯간지러운 말들에 얼굴이 화끈거릴 수 있지만 그런 오글거림과 부끄러움은 시간이 지나면 증발한다. 까끌거리는 종이 위에는 딱 한 스푼만큼의 마음만 남는다. '누군가에게도 내가 얹은 마음이 그 어떤 선물보다 값졌길!'라는 싱거운 생각으로 마무리해본다.
by.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