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열여섯 번째 단어: 중심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산등성에 있다. 오르락내리락 산등성이 동네는 한집 두 집 모여 살기 시작하여 생겼다. 계획형 신도시의 바로 옆에 위치한 꼬부랑 동네. 학교에 가려면 거진 등산을 해야 했고 나중에 가서는 지각을 면하기 위해 그 오르막을 1분 안에 달려내는 쾌거를 얻으며 졸업하게 된다. 학교 가는 것부터가 울렁이는 이 동네에서 자전거 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동네 공원이나 운동장에서 타는 건 가능했지만, 아, 그걸 끌고 다시 집에 갈 생각을 하면 아득해지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이 때문에 동네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내가 자전거를 배운 건 스물 하고도 두 살이었다. 어릴 때 배울 기회가 아예 없던 건 아니다. 난 자전거보다는 두 다리로 타는 인라인 스케이트가 더 좋았을 뿐이고, 이 울룩불룩한 동네에서 꾸역꾸역 자전거를 배울만큼 자전거가 타고 싶지는 않았다. 오르막을 오르기는 아득하고 내리막은 너무 무섭잖아.
또, 나는 중심 잡는 걸 줄곧 어려워했다. 달리기를 할 땐 툭하면 라인을 밟았다. 나는 앞을 보고 뛰는 건데 사실은 어느 한쪽으로 자꾸만 몸이 기울었다. 잘 뛰면 뭐해, 제대로 못 뛰는데! 점프를 해도 뒤뚱거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가만히 서 있어도 기우뚱거렸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애처럼 흔들리는 내게 자전거는 묘기에 가까워 보였다. 10센티도 안 되는 폭 위에 내 몸뚱이 하나를 턱 올린다니 말도 안 돼. 몸이 옆으로 쏟아져내리면 어떻게 해? 그 외에도 자전거를 배우지 않을 이유야 충분했다.
그렇게 자전거를 못 타는 어른으로 자랐다. 매번 한강공원에 놀러 가면 내 친구들 중 한 명은 2인용 자전거에 타야만 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몰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친구들은 자전거를 탈 줄 알았다. 다들 자전거를 언제 어디서 몰래 배운 거야?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땀에 닿는 바람은 더 시원하고, 물빛은 지나는 자리마다 모양을 달리했다. 해가 질 때까지 타고 싶었다. 치킨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나지만 까짓 거 한강 치킨 안 먹어도 됐다. 그렇지만 나를 뒤에 태운 친구는 두배로 힘들기 때문에 더 타고 싶어도 탈 수 없었다. 그래 나도 이제 자전거를 배우고 싶어.
그렇게 결심 아닌 결심을 한 후 자전거를 배웠다. 매번 자전거를 타고 싶지만 무섭다는 말을 하면 친구들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선 자전거를 배울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넘어지는 건 싫었다. 아프고, 창피하잖아. 그렇지만 이런 경험담은 허튼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 역시도 자전거를 배우면서 큰 이변 없이 넘어졌는데 이게 웬걸, 생각한 것만큼 아프지 않았다.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는 공원이어서 바닥이 꽤나 푹신했기 때문일까? 이 정도면 넘어지면서 배울만 하네.
넘어진다는 건 중심을 잃는 거다. 넘어지는 게 무섭고 아픈 게 싫다면 중심 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가만히 서 있어도 뒤뚱거리는 난데,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자전거를 몸에 익히며 중심 잡는 법을 배웠다. 중심을 잡으려면 쉬지 않고 발을 구르면 된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질 것 같을 때 왼발을 구르면 다시 왼쪽으로 기울고, 왼쪽으로 기울 때 오른발을 구르면 다시 오른쪽으로 기울고... 넘어질까 잔뜩 긴장해서 등 뒤에 식은땀이 쭐쭐 나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중심을 '잡는다'는 건 한가운데를 쥐고 잡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쓰는 것이다.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열심히 움직여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몸을 쓰는 일도 마음을 쓰는 일도 중심을 잡으려면 아등바등해야 하는 걸지 모르겠다. 왠지 그런 모습이 좀 짠 하기도 하고 모양도 빠지지만, 그렇게 앞으로 달리고 달려야만 물빛도 풀빛도 담을 수 있으니 괜찮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이야 뭐 강바람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by.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