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두 번째 단어: 샌드위치
언젠가 그런 짤을 본적이 있다. 굉장한 아싸인 어떤 사람이 서브웨이에 처음 갔는데, 빵 종류부터 치즈, 야채, 소스 종류까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는 수많은 질문을 받다 보니 너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 계산대에서 그만 울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 짤 아래에 달린 댓글은 온통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투성이었고 나도 그 짤에 친구를 태그해 ㅋ 몇 개를 달았던 것 같다. 저 이야기가 이토록 인터넷 세상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우스웠기 때문은 아닐 거다. 우리 모두 그 작은 샌드위치를 주문하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당혹감을 느꼈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이 짤을 보고나서 나도 내가 서브웨이를 처음 주문해 봤을 때를 떠올렸다.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분명한 건 경복궁 주변의 대로변에 있는 서브웨이였다. 나는 아직도 그 주변을 지나다니다가 그 서브웨이를 볼 때면 뚝딱거리며 서브웨이를 처음 주문해본 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멋쩍은 웃음이 난다. (은근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다)
내가 먹고 싶은 거 선택하는 게 뭐가 그렇게 긴장되던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웅얼댔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긴장 되어서 갈 때마다 주문 순서와 대사를 머릿속으로 두 번씩 연습하는 찌질한 치밀함을 보였다. 스무 가지는 되어 보이는 생소한 이름의 메뉴(BLT와 BMT는 아직도 헷갈린다.)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나면, 빵 선택이라는 또 다른 난관이 등장한다. 무슨 빵 종류가 이렇게 많은 거야. 그 땐 싫어하는 피클을 빼달라는 말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샌드위치를 받고 나서 뚜껑을 열어 피클을 따로 뺀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가능하지만, 과거 나에게 무언가를 많이 달라는 요구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건 파워-소심-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대사였다. 상상만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고. 아무튼 이 소심 인간은 커스터마이징이라는 이 브랜드의 핵심 아이덴티티를 무시하는 짓을 해버리곤 했다.
나는 이제 토마토는 빼고 올리브를 많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에그마요는 빼고 빵만 데워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는 그런 이십네 살이 되었다. 이제 샌드위치 주문 정도는 익숙해져 더 이상 가게에 들어가기 전 마음 속으로 주문순서를 연습하지 않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주문하는 게 뭐라고 그렇게 서툴고 부끄러웠던 건지 웃음이 난다.
나는 종종 처음 맞닥트리는 새로운 일에 당혹감을 느낄 때면 경복궁 역 서브웨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주문을 하던 날을 떠올려본다. 얼굴이 화끈거리던 주문은 어느새 익숙해졌고 이제 그 날은 웃어넘길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이 날을 떠올리는 건 사소한 용기를 준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찌질한 나를 응원해 준다. '야 내가 해봤는데, 그거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지더라. 찌질해 보이니까 그만해.’라고.
새로운 일들에 진땀을 빼고, 바보 같은 실수에 좌절감이 들 때, 나는 계속 계속 이 날을 떠올려야지. 나는 계속 서툴었고 앞으로도 서툴 거니까. 죽는 날까지 날마다 몇 번이고 새로운 일과 맞닥트릴 것이고 나는 평생 서툰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과거의 찌질하고 서툴었던 내가 현재를 사는 나를 응원해줄 거니까.
by.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