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한 노래들(My Favorite Songs)
같이 놀자~!
우리 같이 놀아요
뜀을 뛰며
공을 차며 놀아요
우리 같이 불러요
예쁜 노래
고운 노래 불러요
이마엔 땀방울
마음엔 꽃방울
나무에 오를래
하늘에 오를래
개구쟁이
-노래:산울림,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크레파스 향기가 진동하는 둣한 앨범 쟈킷, 진짜 크레파스로 산울림의 맏형 김창완 아저씨와 형제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해요. 「아빠와 크레파스」가 참으로 오랜만에 생각이 나 울컥 하기도 했었죠. 아이들이 어릴때는 늘 함께하던 곡들이었는데 자라 각각의 개성대로 길을 나서며 공유된 유년들을 상실하듯 사는 듯하여 집에 오면 신생아 취급하던 저인 것도 맞지요.(웃어요)
「왕자표 크레파스」도 몇 십 년만에 떠오르며, '아니겠지만, 혹시, '코로나19주범'이 '왕자표 크레파스'?' 하며 너무 놀라기도 했었던 며칠 전이었습니다.
"왜? 학교 안 가고?"
"......저, ......"
"공책 사려면 어제 저녁에 미리 말을 해야지! 너는 꼭 학교 갈때서야 말을 해!"
"오늘까지 크레파스 안 가져오면 학교 오지 말랬어요......"
"으이그 이놈의 가시내......"
후다닥 맨발로 나서시듯 옆집 금성이네 외가로 다녀오시더니,
"여기 있다! 얼른 갔다 와! 지각하니!"
"예, 고맙습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애들 다 가고 없는 등교길, 혼자 가는 길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창피하고 가기 싫지만 그래도 어렵게 마련해 주신 크레파스 값이니 용기를 내어 살금살금 소리없이 신작로까지 가다보면 어느새 삼거리슈퍼 앞이고, 지각생 얼굴이 말이 아니지만 친구네집 문방구에 들려 사야하고, 체면불구하고 교문을 지나 교실까지 들어가노라면 심장이 이미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던 것이다. 기억이 사라진걸 보면,
사실, 문방구를 나와 교문까지 걸어가며 나는 늘 혼자 노래를 부르고는 했었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 창입니다......'
그러면 어쩐지 가는 길이 평안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지던 것이니 '꽃밭에서'는 나의 심장다독제였던 것이다. 책가방에 넣거나 들고가던 「왕자표 크레파스」에서는 페인트 냄새 같은 진한 동화냄새가 나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없이 어디까지 걸어가도 갈 수 있을 것 같던 상실된 듯하지만 올바른 정신들, 크레파스는 내게 '꿈꾸는 샘'과 같았다고나 할까?
다시 생각해보건데, 초등 6년과 중등 3년간 어쩌다 한 두번, 두 세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온통 그날만 가득한 것 같아 수치심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기도 하니 작은 실수일지라도 한 번의 실수는 참으로 큰 타격을 주는 것이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을 교훈 삼아 같은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는 내가 되었었지만 티 하나 없기를 바라는 내 맘에는 옥에 티처럼 껄끄러움이 되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잊어버린 나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렇게 5학년이 되고, 실과시간에 배운 나무심기 방법을 적용하여 밭둑에 자라난 대추나무 한 가지를 꺾어와 꺾꽂이를 하였는데, 그 날 그 대추나무가 꺾이는 순간 「자연보호」에 목숨을 걸듯 살아오던 내 자아속에서 '아얏!, 하는 소리가 들리며 대추나무가 너무 가여워 어찌할 줄을 몰라하던 맘을 들고 집에 돌아왔었던 것이다. 그 대추나무는 뒷밭에 가는 길가에 어느 날부터 조금씩조금씩 자라던 나보다 더 어린 나무였고 해마다 가을이 와도 대추는 구기자만하게 열리거나 없는 것이 많아 사실 못먹는 대추라고 무시받던 길가의 주인없는 대추나무였었다. 하기에, 들꽃 한 송이 꺾는 일에도 가슴 졸이던 내가 그날은 과감하게 시행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심성이 상처를 받고 찜찜해 하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뒤안 담장 아래 심은 대추나무는 가사책에서 보고 배운대로 심은 까닭인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나는 그저 놀라기만 하였었다.
마침,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도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와 읽던 5~6학년의 날들, 꿈인가 생시인가, 제제의 「밍기뉴」가 되버린 나의 대추나무, 진정 그러하였었기에 실제 삶으로 살아온 나조차도 그러한데 타인은 더더욱 거짓말처럼 여겨졌었던가 보았다. 어찌되었든 그 대추나무는 내게 커다란 상을 안겨주었고, 지금은 얼마나 큰 알곡을 낳는 커다란 대추나무가 되었는지, 1982년 가을, 우리가 살던 집을 샀던 친구네 가족도 엄마도 모두 기쁘게 알려주시고는 하셨었다.
나의 상(賞)은 그 해 1979년 가을에야 운동장조회시간에 받을 수 있었고, 박정희대통령 서거일(1979.10.26.)과는 앞뒤로 어찌되는지 잘 모르는게 사실이다. 4월 봄, 식목일 며칠 전에 나무를 심고, 식목일 기념 백일장 공문을 담임선생님께서 학급 전원에게 종례시간에 알려주시어 참여하게 되었던 「식목일기념 백일장」으로 우리 학급 뿐아니라, 전교생에게 참여가 주어진 엄연한 공정한 경연잔치였었던 것이다. 1979년 전남지역 초등학생들은 모두 아는 사실일것이다.
그런데 나는 상을 가을에야 받게되었었다.
"오늘 숙제는 집에 가서 「식목일 기념 백일장」에 제출할 원고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부문으로 글을 써서 내일(1979.4.4일 종례라면 모레)까지 제출하기로 한다. 다른 숙제는 없다. 이상."
담임선생님의 종례시간에 「식목일 기념 백일장 글쓰기」 대회 통보를 숙제로 받아오며 나는 한껏 부풀어 설레임이 가득하였었다.
"오늘은 우리집에서 같이 숙제하자~!",
라고 말한 나의 제의에 동네 죽마고우는 기다렸다는듯이 흔쾌히 동의를 하여, 골목을 돌아 마당을 지르고 안방으로 들어와 둘이 배를 깔고 누워 원고지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었다. 그러니까 원고지는 그날 하교하며 문방구에서 사 오거나 집에 있던 것을 사용했을 것이다.
스스슥,
"에이, 나는 못하겠다. 나 간다......"
"응? 왜?......"
"그냥, 집에 갈래...... 내일 보자. 간다."
"......응?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안녕......"
친구는 쓰다 만 원고를 들고 집으로 갔고, 마루까지 나와 서서 배웅하던 나는 갑자기 깨진 적요(寂寥)에 원고지 길이 막히며 흔들린 시심이 제자리를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단번에 쓴 몇 행을 읽고 읽고 또 읽고, 마지막 행 정리가 쉽지 않아 고민고민하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또 쓰다 어렵게 마무리를 지어 다음날 아침 학교에 제출을 하였었다.
학교를 입학하고 난 후, 숙제가 있는 날이면 집으로 곧장 오기 전에 가끔 동네 주인격인 앞산에 올라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반석 바위에 앉아 숙제를 하고 오고는 했었다. 물론 늘 함께 다니라는 선생님과 외할머님과 부모님들 말씀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중이었고, 바위에 여덟칸 열칸 공책을 놓고 쓰노라면 울퉁불퉁 글씨가 비틀리기도 했지만, 바람에 공책이 날리는 소리나 그 페이지 넘어가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생생하기 그지 없는 그림들과 같았다.('이웃집 토토로'를 본 순간 나는 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인듯 멀리 뵈는 서해 칠산바다와 작은 섬들, 학교 사회책에서 본 농지정리 잘 된 논밭들, 새학기 선생님의 가정방문때 따라다니며 가 보았던 친구들 집들이 있는 이마을 저마을들, 사방을 빙 둘러 보면 그토록 행복할 수 없었다. 우리집 담장 하나 사이로 외가가 있는 친구와 같이 오르던 날이면 친구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동쪽 '동봉부락'으로 내려가고, 나는 서쪽 '서봉부락'으로 내려오고는 하였고 대부분은 같이 서봉으로 내려와 친구는 외가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었다. 사실 내게는 친구였지만 한 살 많은 친구로 그 친구와 나의 부모님 네 분께서 먼저 일명 절친관계들이셨기에 쉽게 친구가 되었던 것으로 내게 죽마고우 또 다른 동갑내기 친구, 백일장에 제출할 원고를 같이 썼던 친구는 언니라고 부르는 관계들이었다.
원고 제출후 결과를 기다리며 나날이 흐르던 어느 토요일 오후, 환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빨간 내복을 입고 이불을 뒤집어 쓴채 안방에 누워 잠을 자거나 숙제를 하거나 책을 보았을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안나야! 안나야! 문 열어! 문 열어 봐!"
"네? ......네!......"
옷 갈아 입을 시간도 없이 빨간내복 차림으로 쓰고 있던 이불을 뒤집어 쓴채로 얼굴만 빼꼼히 내밀며 문고리 걸어 둔 안방문을 열고 보니 광주에서 자취하시며 고등학교를 다니시던 동네오빠가 급한 맘에 마루에 배를 걸치고 엎드려 문을 열려고 하셨다.
"안나야! 너 이름 정안나 맞지?"
"네? 네!"
"너 백수서교 5학년 2반 정안나 맞지?"
"네, 왜요?"
"있지, 오빠가 새벽에 신문을 돌리다 우연히 기사를 보았는데 네 이름이 있지 뭐니?"
"네?"
"진짜야, 내가 보았어! 너 백수서교 5학년 2반 정안나 맞지? 거기 신문에 네 이름이 있어 놀라서 오빠가 알려 주려고 이렇게 빨리 왔어!"
"네?......(너무 놀라며)......아니, 저, 식목일 기념 백일장에 원고를 제출하기는 했어요......"
"응? 그래? 그렇지!, 그래, 학교에서 좋은 소식이 갈거야! 안나는 좋겠다!"
"우와~! 진짜에요?"
"그럼, 진짜. 우와 축하해~!"
"아, 예, 감사합니다. (방글방글방글......)"
"오빠 간다, ......"
"예~!......우와~......"
아마 축하한다고 한 번 더 말 하셨지 싶다. 나는 그리고 기억이 없다. '거 「안네의 일기」 안나?'라고 하시어 '아니요, 그냥 저요', 라고 답해 드렸었지 싶다. ......그리고보니 나는 그 날 이후 그 오빠를 단 한 번도 뵌적이 없다. 무려 1979년 12살 봄부터 2025년 지금까지 만 46년을!(오마이갓! 쓰는 나도 놀라는중!)......오빠는 옆집 금성이 외가의 옆집에 사시던 분으로 오빠의 동생 언니들과 동생들과도 늘 신나게 놀던 나였다.
오빠네 친할아버지께서 늘 친절히 맞아 주시고, 놀러 갈때면 마루 위 천정에 걸린 기다란 밧줄을 잡고 천천히 마당으로 나오시고는 하셨었다. 이마에 상투 밑에 쓰는 두건을 쓰셨었지 싶다. 다시 생각해보니 '전통 정좌관'을 늘 착용하시고 눈처럼 흰 삼베 한복옷을 일상복으로 입고 계셨을 것이다. 놀라운 일인 것이다. 아, 나는 참 몹쓸 아이인 것이다. 그토록 오래토록 인사를 드리지 못하다니......
2025년 12월 지금으로부터 한 두 해전 친정어머니와 통화중 동네어르신들 안부를 여쭈니, 벌써 언니와 오빠네 두 부모님께서도 다들 돌아가시고 아니계시다는 말씀에 또 너무 놀라고 아쉬웠었다. 어린 나만 보시면 깨물어주고 싶다시던 고마우신 아주머니셨는데......성공하여 내려가면 꼭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리고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나는 계속 학교에서 그 상을 받을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엇다. 하지만 담임선생님도 어느 누구도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알려주시는 분이 없었고, '이상하다, 분명 수상을 했다고 했는데......',라며 가슴 조림이 시작되었었다. '대상이 아닌 장려상인가'라고 하셨었지만, 그래도 너무 기뻤던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비우고 '언젠가는 오겠지, 신문에 났다는데 어디 가겠어?',라며 인내심양성책이 되어갔을 5학년이 될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애매모호한 시상일이었는데, 그러고보니 1979년 추석이후에 받았을 것 같은 것은 구령대에 입고 올라간 '빨간 티셔츠와 파랑 바지'가 추석빔이었던 것이다. 외할머니께서 오일장에서 사 오신 추석빔, 늘 해마다 기다리던 날들중 하나로, 새옷을 받으면 그 알수 없는 도회(都會)적 내음에 취하여 새옷 속에 코를 박고 눈을 감던 시간들이 선명하고 아직도 가끔은 그런 새옷 냄새를 맡고 싶거나, 우연히 불현듯 갑자기 그런 그리운 향기가 소스라치게 퍼져나 반가워하는 나였었다.
1979년 가을, 월요일 운동장 조회가 있던 아침,
"모두 밖으로 나가! 운동장으로 모여! ...... 아, 그리고 안나는 이리 와!"
"네? 네!......"
"오늘 안나는 식목일 백일장 상장을 받는다."
"네?"
"지난 봄 응모한 그 작품이고, 상품은 학교에 두고 상장만 받을거야......"
"네,......"
"그리고 그 작품 마지막 연이 조금 미흡하여 선생님이 두 줄정도 보탰었다......"
"네? 아니, 왜요?......어휴......"
"얼른 나가!"
"네......"
두근두근두근두근......휴우......
남학생 두줄 여학생 두줄, 1학년부터 6학년까지 24개반 정렬한 운동장,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 ...... 다른 선생님께서 확성기로 수상 시상 안내 멘트를 하시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 '열중쉬어(列中쉬어)' 자세로 기다리던 순간,
"정안나! 앞으로!"
"안나야! 너!"
옆줄에 섰던 동네 죽마고우, 그날 원고지를 같이 쓰다 먼저 갔던 친구가 뒷짐진 어깨를 빼어 말하려는듯 고개를 돌려 가만히 속삭였다.
"응? 응."
뛰었다.
'가다 넘어지면 어쩌지? 발부리가 걸리면 어쩌지? 내가 달리는 모습이 예뻐야할텐데, 나 괜찮은가?......' 이런 생각들은 이미 신문에 기사가 났었다는 소식을 듣던 봄부터 내 맘속에서 연습되었었던 것으로 당일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구령대 위로 잘 올라갈 수 있을까? 계단에서 넘어지면 어쩌지?......' 교실에서 시상식 소식을 듣던 순간부터 들던 맘들이었을테다. 추석빔 새옷을 입고 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등등등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그것도 수많은 선생님과 선후배 학생들 앞에서 받는 상장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날 이후 운동장 조회가 있는 날이면 햇빛에 쓰러지는 일사병 환자라고 자칭 말하고 싶어하며 교실에 남아 교실지킴이를 자처하는 학생이 되어 갔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놀아요 뜀을 뛰며 공을 차며 놀아요......'는 반갑기 그지없는 내 마음으로 마음은 마을 공터에서 친구들이나 후배들과 놀고 있지만 몸은 고학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삼가하던 중이기도 하였으니 갈등선이 생성되던 때들이었던 것이다.
"안나야~! 안나야~! 밥 먹어라~!"
"네~!"
초등 저학년까지는 해가 지도록 마을 공터에서 놀다 외할머니께서 하늘로 뻗은 기다란 굴뚝으로 밥연기를 다 내뿜은 후 부르시던 목소리, 아마 내가 공터에서 놀지 않게 된 건, 그 목소리가 내게는 너무 좋은 천국의 부름이지만, 어쩐지 외할머니께서 부끄럽지 않으셨을까, 하는 자각이 든 이후 공터에서 노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었다. 너무 죄송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개구쟁이처럼 동네 당산나무나 또 다른 팽나무에 올라 타는 일을 즐기기도 하던 나는 찾아 보기 어려워졌고, 우리 사랑하는 세 딸의 아빠인 남편을 만나며 개구쟁이처럼 만나게 되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였으니.
「어린이에게 보내는 산울림의 동요선물」,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개구쟁이」, 는 어른의 속 마음에 자리하는 어른이 된 자아의 어린이, 즉 동심에게도 충분한 선물이 되어 함께해 온 것이다.
-커버이미지 : Pinterest/The Hush Of Winter Play Paint By Numbers - 40X50CM/16X20" (Already framed)
-참고이미지 :*개구장이 이미지 확대보기 : 지식백과
*곡 정보>멜론:내게 사랑은 너무 써, 산울림
(저작권에 부합한 내용이 있다면 메일로 연락을 주십시오.)
-Writer : Evergreen 정안나/평생교육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