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된 지 27년 차가 되어가는 이의 생각
(집)
“아휴, 학교 가기 싫다.”
“가야지, 네가 선생님인데?”
(교사는 교실로 순간이동) 수십 명의 아이들이 큰 소리로 인사하고 교사 얼굴에 방학 숙제를 들이대며 서로 밀친다, 늦은 아이 손을 잡고 뛴다, 밥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아이와 인사한다, 체육 시간 날아오는 탱탱볼에 얼굴을 맞는다, 전화를 받으며 메모한다.
몇 년 전, 이 CF를 보며 ‘어, 저거 난데~!’를 외치던 나. 이 CF가 초등교사의 피곤한 삶을 너무도 정확히 잘 담아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위의 어느 한 장면도 내가 아닌 것이 없었다. 아이들의 에너지 가득한 외침은 소화불량을 일으켰고, 무질서함은 내 성량을 키웠다. 체육 시간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배구공, 농구공, 탱탱볼 다 맞아봤고, 멀티플레이는 축구선수뿐 아니라 초등교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었다. 인터폰 전화받으며 시험지 채점하고, 밥 먹으며 손으로 인사하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표정이나 미묘한 분위기 등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 여유는 결코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미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자 꿈을 꾸며 달려왔고 결국 꿈을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늘 행복한 건 아니었다. 앞서 회상한 CF처럼 학교에 가기 싫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학교는 내가 생각한 조직이 아니었고, 학생은 내가 꿈꾸던 아이들이 아니었으며, 교사가 하는 일이란 내가 예상한 것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학교는 교사들이 기댈 수 있는 곳 같지만 정작 교사가 학부모와 대치될 때면 교사의 편이 되어주지 않곤 했다. 교사들은 일반 회사처럼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는 것이 아니고 대략 2~5년가량 근무 후에는 옮기기 때문에 보통 교사들 간 유대감이나 결속력이 그리 깊지 않다. 겉으로는 거대한 소속감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순간 ‘책임’의 현실 앞에서 모두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선을 긋기에 ‘결국은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며 더 깊은 외로움을 주는 조직이랄까. 그리고 지금의 학생들은 예의나 인성 교육의 부실 속 지나친 선행 학습과 과잉보호로 교실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런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교사가 하는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잘 준비하고 가르치는 것이 내가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해 한해 갈수록 부수적인 일들이 그 기본을 점점 더 침해하고 있다. 아이들이 가고 난 뒤 교실을 청소하고, 아이들이 교실에 두고 간 휴대전화를 찾는 연락이 오면 찾아서 전달하고, 어디선가 다툼이 일어날 때면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을 하는 것보다 각 학부모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될 때가 더 많고 힘들다. 또, 보통은 1년마다 손수레를 밀며 교실을 옮기는 이사를 해야 하고, 2~5년마다는 학교를 옮기면서 차를 이용해 또 나름의 작은 이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맡은 학급 외의 일반적인 업무도 해야 한다. 요즘은 학교에서 교육보다는 보육을 더 많이 하고 있는 것 같고, 나라의 방침도 그 구분 없이 학교에 보육을 더 밀어 넣는다. 예전에는 보육이 교사의 친절로 암묵적으로 제공되었다면, 이젠 의무로서 강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명감으로 시작했던 교사의 자리는 정체성이 흔들리고, 갈수록 의욕과 사기는 꺾이고,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들이 늘고 있다.
한 번은 학급별 3명씩 상장을 주었는데 “선생님, 왜 우리 애가 2등이에요? 그 기준이 뭐죠?”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당연히 본인 자녀가 1등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학부모였다. 또 한 번은 생활통지표에 적힌 교사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바꿔달라는 학부모도 만나봤다.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교사를 할 걸 그랬네요."라던 학부모를 면전에서 본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학년별로 실시하던 영어 듣기 평가에서 문제를 낸 교사 발음이 이상해서 아이가 틀렸다는 민원도 건너서 들었다. 굳이 더 말하지 않더라도 뉴스는 학교에서 삐그덕거리는 여러 문제를 넘치도록 보도하고 있다. 정말 처음에 예로 들었던 광고 속 음료가 ‘피로회복’을 도와준다면 날마다 마셔야만 버틸 수 있다. 어떤 민원을 받든,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든 이렇게 마음이 상하고 의욕이 떨어지는 날이면, 결국은 같은 동료 교사들끼리의 위로밖에는 답이 없다. 그리고는 학교를 떠나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나는 아직 학교에 남아있어서 이미 떠난 분들보다는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 차가운 학교에, 무감각한 학생에, 민원 제기하는 학부모에 지쳐서 정년보다도 훨씬 일찍 떠난 선생님들보다는 힘든 일을 덜 겪었으니 남아있는 거라고 위안을 삼아야 할까. 세상 모든 직장과 삶이 그러하듯, 나의 직장과 삶도 나만의 꿈과 기준을 갖지 않고는 버티기 어렵다. 버틸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버틸 수 있다.
몇 년 전 제자가 나를 기억하면서 교대에 진학했다고 기쁘게 연락해 왔는데, 그래서 축하한다고 했는데, 그 제자는 지금은 어떤 마음일까. 사회적 뉴스만이 아니라 실제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이 마음속 상처와 무기력이, 선생님들이 사명감과 애정으로 그동안 꽁꽁 감춰왔던 그 무기력이 사회에 모두 발가벗겨져 드러난 것 같다. 이젠 이 세상이 모두 다 실체를 알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그래서 이제는 누가 이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올까 싶다.
나는 아직 학교에 남아있는 자로서, 새로 들어오는 후배들을, 어렵게 용기 내어 온 후배들을 격렬히 환영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알려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함께 옆에 있어주는 것..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은 뭘까 계속 생각해 본다. 아직은 남아있는 분들과, 새로 오는 후배들에게 온기를 전하는 것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