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초등학생에게 전하는 야누시 코르차크
<희망을 부르는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계절마다 나오는 이 잡지의 지난 호 몇 권을 온라인으로 조금 읽어봤어요. 어린이들의 읽을거리를 위해 이렇게 아름답고 새로운 글과 그림, 그리고 사랑으로 준비하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 또, 다양하게 독서하는 여러분과 함께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워요.
여러분은 사회 소식을 어떻게 접하고 있나요? 신문, 뉴스를 직접 보거나 아니면 부모님, 친구들을 통해 이야기를 듣나요? 보통의 신문이나 뉴스는 어른 대상이라서 영상이 너무 무섭거나 용어들이 어려울 때가 있죠.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어린이 신문이나 교육 방송(EBS) 뉴스를 보는 게 좋다고 이야기해요. 요즘은 어떤 뉴스가 있나요? 오늘은 대통령 내외분의 해외 방문과 연예인들의 기사가 많네요. 한편, 길어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새로 시작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진행 중이지만, 우리는 큰 영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전쟁과 관련해서 우크라이나에서 곡물 수출을 많이 한다는 것, 그래서 이 전쟁과 우리나라의 밀가루 가격이 오르는 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북한과 휴전상태일 뿐, 불시에 날아오는 미사일 등 해상공격과 대응이 계속되고 있죠. 전쟁이나 북한의 미사일 공격이 있을 때면 걱정이 들어요. 비상식량이나 긴급배낭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죠. 하지만, 반복되는 이런 뉴스와 긴장 속에 드는 생각은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하는 거예요.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나눌까 해요.
선생님은 지금 4학년과 5학년 체육 과목을 가르치고 있어요. 요즘 4학년 친구들은 플로어 볼을 배우고 있어요. 블레이드가 달린 긴 스틱으로 공을 다루는 새로운 활동이라 모두가 참 좋아해요. 그리고 5학년 친구들은 스웨덴의 민속춤인 구스타프 스콜을 배우고 8명씩 스퀘어 대형으로 춤을 추었죠. 남녀 친구가 손을 잡는 것부터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지만, “손잡기 싫다고 안 잡거나 옷만 잡는 사람은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하겠어요.”라고 하자 모두 손을 제대로 잡기 시작했어요. 첫 수업 때는 시큰둥하던 친구들도 마지막 수업 때는 아주 잘하고, 재미있다고 말할 때 가르친 보람이 느껴졌어요. 6학년들은 지나면서 보니 강당에서 배구를 하더라구요. 공을 칠 때 손목이 좀 아프긴 하지만, 공을 쳐서 멀리 가고 네트를 넘어가는 걸 보는 기분은 참 좋아요. 선생님 아들이 4학년 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엄마, 학교에선 체육 시간하고 점심시간이 제일 좋아.”라고 말하던 아들을 생각하며, 아주 신나고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선생님을 가장 좋아하나요? 웃기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시는 분, 아이들의 말을 잘 들어주시는 분, 공부를 정말 귀에 쏙쏙 잘 들어오도록 가르쳐 주시는 분도 계시겠죠? 선생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가장 오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수학을 잘 가르쳐 주셨고 정말 친절하셨어요. 그 덕분에 중학교 가서도 수학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수업 마치고는 몇몇 아이가 남아서 선생님을 도와드리곤 했는데, 다 마치고 나면 선생님이 떡볶이를 사주셔서 같이 교실에서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때 사회과 부도에 나오는 지도 하나를 기름종이에 대고 똑같이 그리는 게 있었어요. 지도에 있는 여러 선과 글씨들을 검정, 빨강, 파랑 볼펜을 바꿔가면서 최대한 똑같이 그렸죠. 1년 후 중학생이 되었는데 동네에서 아는 동생이 우리 집에 왔어요.
“언니, 우리 선생님이 언니가 작년에 기름종이에 그린 지도 있으면 빌려 오라고 하셨어요.”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아, 선생님께서 내가 그린 지도를 아직도 기억하시는구나.’
그때 나는 너무 놀라서 생각도 몸도 잠시 멈춰버렸죠. 다행히 지도는 집에 있어서 그 동생 편에 보내드렸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 고맙다고 적힌 선생님의 쪽지와 지도를 돌려받았어요. 난 그 선생님의 칭찬, 친절함, 그리고 나를 기억해 주시는 따뜻함으로 아주 오랫동안 행복했어요. 그전부터도 선생님을 꿈꾸고 있었지만, 이 선생님과의 행복함으로 더욱 굳어지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루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20년 넘게 가르치고 있어요. 이렇게 좋은 선생님 한 분과의 모든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나요. 그리고 그 선생님으로 인해 교육대학교를 가서 꿈을 이루었으니, 제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리고, 30대에 또 다른 좋은 선생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선생님을 직접 만난 건 아니에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논문을 쓰며 알게 된 분인데, 안타깝게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그분의 책, 그분께 배운 제자들의 인터뷰, 관련된 논문 등 자료들을 찾으며 알게 되었어요.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종이 위 글자들을 통해서도 전해지는 그분의 사랑과 신념은 너무 따뜻합니다. 추운 겨울날 외투 주머니에 넣고 만지는 핫팩, 찬바람을 맞다가 집에 가서 마시는 코코아 한잔, 그보다 더 오래 따뜻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소개할까 해요.
여러분, 매년 11월 20일이 무슨 날인지 아나요? 바로 1954년에 선포된 세계 어린이날(Universal Children's Day)이랍니다. 이후 1959년 11월 20일, 유엔 총회는 아동의 특별한 권리를 정한 '아동권리선언'을 채택했어요. 1948년 12월 10일에 유엔총회가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한 지 11년이 지나서 아동권리선언이 채택된 것이죠. 그리고 30년이 지나서, 1989년 11월 20일 유엔은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채택했어요.
유엔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CRC)은 국제사회가 이 세상 모든 아이를 위해, 그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 증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약속이죠.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우리나라도 비준한 국제법이며, 우리 헌법 제6조에서는 헌법에 따라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어요. 이렇게 어린이와 어린이의 권리도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누군가를 소개한다고 하고는 왜 이렇게 어린이날과 아동 권리에 관해 설명하는 걸까요. 그건, 소개할 선생님이 이런 일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분은 직접 많은 아이를 돌보면서 아이들의 권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에요. 이분은 ‘야누시 코르차크(Janusz Korczak)’ 선생님이에요.
그럼 이제 코르차크 선생님을 소개할게요. 먼저 이분의 이름을 잘 읽어 보세요.
‘야-누-시-코-르-차-크’.
이름을 보면 이 선생님은 과연 어느 나라 분일까요? 정답은 아래에 있습니다^^
내가 아는 코르차크 선생님은 아름다운 색들이 더해진 무지개와도 같은 분이세요. 빨주노초파남보, 하나하나의 색도 이쁘지만, 함께 있어서 마치 하늘 위에 놓인 아름다운 다리와 같은 무지개요. 코르차크 선생님을 설명하자면,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 주며 치료하는 유능한 소아과 의사 선생님,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소설이나 교육에 관한 책을 쓰신 멋진 작가 선생님, 거리의 아이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의사 생활을 그만두고 보육원을 운영하신 보육원 원장선생님, 두 번의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애국심 가득한 군인, 전국 아이들의 편지에 답장하고, 라디오를 통해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로했던 상담가, 보육원에서 어린이 법정과 어린이 의회를 운영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가지고 지도하는 교육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미 유명한 분이셔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보육원 아이들 200명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 오른 고아들의 아버지. 이 모든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그 마음은 따뜻하고 활약은 대단하신 분이세요. 어떤 분인지 더 궁금해지나요? 그럼 조금 더 여러분이 코르차크 선생님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줄게요.
코르차크 선생님은 187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셨어요. 폴란드에서 태어나시긴 했지만 유대인이었고,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코르차크 선생님도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의 다리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셨어요. 본래 이름은 헨리크 골트슈미트, 할아버지는 의사, 아버지는 변호사였던 그분의 가정은 부유했죠. 어머니께서는 선생님에게 길거리의 아이들과 놀지 않도록 하셨지만, 선생님은 창문 너머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늘 마음을 주곤 하셨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이 18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갑자기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그래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셨죠. 20세에 의학 공부를 시작하고, 문학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이때 야누시 코르차크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셨죠. 1905년 러일전쟁 때에는 러시아 군대에서 군의관을 지내셨어요.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유대인 소년들과 3주간의 여름 캠프에 참가하며 거친 ‘아이들’에 대해 놀라면서도 빠져 드셨던 것 같아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책을 계속 쓰셨어요. 그리고 고아구호회를 위한 모금행사에 참여한 일을 계기로 고아들에 대해, 그리고 보육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어요. 마침내 1912년 코르차크 선생님의 첫 보육원 ‘고아들의 집’이 개원하죠. 선생님은 아이들이 잘 보이는 곳에 원장실을 배치하는 등 보육원 설계부터 직접 참여하셨어요. 침대가 106개였다고 하니 인원을 대충 알 수 있겠죠? 그리고 겨우 몇 년 후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다시 러시아 군대로 참전하셨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전쟁 중에도 글을 쓰고 원고 뭉치를 들고 다니셨다는 거예요. 이 원고는 국내에서 ‘어떻게 어린이를 사랑해야 하는가’로 번역되었고, 코르차크 선생님이 생각하는 교육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후에 돌아와서는 1919년 두 번째 보육원 ‘우리들의 집’을 같이 운영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계속 글을 쓰고, 보육원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름에는 여름 캠프를 떠나는 무척이나 바쁜,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라서 행복한 선생님의 시간이 이어졌어요. 또 그때 당시로서는 처음이다시피 한 어린이 신문 ‘작은 평론’을 발간했어요. 아이들은 전국에서 편지를 보냈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빠의 이야기, 부모에게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 아이들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읽히기 좋다는 소문이 나서 어른들에게도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대요. 그리고 코르차크 선생님은 1928년 ‘아이들의 존중받을 권리’ 책을 내기도 하셨어요. 이 책을 쓰기 전부터도 아이들의 권리를 계속 강조하긴 하셨지만, 이 책에서는 아이들이 실수하면서 성장할 권리, 미래를 위해서가 아닌 오늘을 살 권리, 그리고 자기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쓰셨어요. 그리고 ‘노(老) 의사의 라디오 정담’이라는 라디오 방송도 하시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고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받던 선생님과 조국 폴란드에 암흑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어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던 것이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어요. 그리고 1940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 내에 유대인을 구별하여 살게 하는 높은 장벽의 게토가 세워졌어요. 유대인이었던 코르차크 선생님과 보육원 아이들은 그곳으로 옮겨갔고, 전쟁 중에도 아이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과 돈을 구하기 위해 선생님은 매일 자루를 어깨에 메고는 여기저기 찾아다니셨어요. 선생님이 너무나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구걸하러 와서 사람들은 피하기도 했대요. 그리고 선생님은 감자가 든 보육원의 수레를 독일군에게 빼앗기자 항의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셨어요. 그렇게 전쟁의 죽음과 가난, 굶주림 속에서 더욱 많아진 길거리의 고아들을 보면 데려와서 함께 돌보셨어요. 코르차크 선생님은 당시 이미 유명한 분이셔서 게토를 떠나 안전히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당신은 밤에 아픈 아이 곁을 떠나지 않는다.”라면서 아이들 곁에 남으셨어요.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가 지나고, 1942년 8월 6일, 독일군은 게토에 있던 사람들을 동부로 가는 기차에 태웠어요. 선생님과 200명의 아이들도 그 기차에 올라타야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어요.
코르차크 선생님의 삶은 여기서 끝났지만, 그분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아이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지켜주시던 영웅 같은 삶을 아직도 추억하고 감사하는 모임들이 있어요. 그리고 특히 1978년 폴란드는 코르차크 선생님의 사상에 기초하여 ‘아동권리협약’을 위한 초안을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했어요. 그래서 코르차크 선생님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1978년은 ‘야누시 코르차크의 해’로 이름 붙여졌어요. 또, 코르차크 선생님의 삶은 너무나도 영화 같아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 ‘코르작(Korczak)(1990)’으로도 제작되었고, 반짝이는 별의 이름 ‘2163 Korczak(1971)’에도 선생님의 이름이 있답니다.
코르차크 선생님은 여러 번 전쟁을 겪으셨어요. 하지만 피하지 않고 참전했고, 모두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면서, 또 보육원 아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돌아가신 지 81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분의 생각과 실천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국제적인 협회도 있고, 선생님처럼 그분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친구 관계, 학업 성적, 진로 등 각자 다른 고민이 있겠죠. 오늘 소개한 코르차크 선생님의 삶을 통해, 여러분 각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생각은 여러분의 힘이 되고, 판단을 해야 할 때 기준이 되어 줄 거예요. 오늘 여러분이 코르차크 선생님에 대해 읽으면서 살아갈 이유와 방법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최민혜 교사
출처: 희망을 부르는 어린이(2023년 겨울, https://youtu.be/7r_cPqujJ6E?si=vrMl5vcJBCTqjjun),
인디고서원 홈페이지 (www.indigoground.net), 어린이잡지 홈페이지(www.indigokid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