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콘텐츠텔링
2017년은 국민의 힘으로 새로운 대통령과 함께 희망을 품게 된 뜻깊은 해였다. 2017년을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수사가 있다면 대한민국 민주화의 불씨가 된 87년 6월 항쟁 30주년이라는 점이다. 폭압적인 군사정권은 언론과 문화를 장악하고 스크린, 스포츠, 섹스라는 세 가지 코드로 대중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밟히면 밟힐수록 풀보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의지의 한국인 아닌가!
영화 <1987>을 보면서 나는 많이 울었다. 물론 나는 박종철, 이한열 열사와 같은 고향도, 학교 선후배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시대 풍경은 나의 오늘이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너무나 깊이 각인시켜주었다.
영화에서 故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실을 폭로하는 공간인 명동성당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약자들의 정의를 위해 헌신한 공간이다. 1985년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웃집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미사 때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소속이셨던 신부님의 강론을 듣게 되었다. 뉴스에서 듣지 못한 시대의 아픔, 문제들을 종종 들려주셨던 신부님은 정의롭게 시대에 저항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신부님의 세상 이야기로 조금씩 귀가 트이기 시작한 나는 중학교 3학년 생일에 친구로부터 생생한 노동자의 현실을 담은 시집을 선물 받았다.
늘어쳐진 육신에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박노해 <노동의 새벽> 중에서
집 근처 건국대에서 불어오는 최루탄 바람의 진실은 가려지고 TV 속 시위대는 폭도들로 묘사되던 그 시절. 너무나도 열악한 노동자들의 고단한 하루하루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시집과 신부님의 강론 속에서 느껴지는 독재 정권의 잔혹함은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막연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영화 <1987>에 등장하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헌신과 희생은 지금의 내 삶을 돌아보고 이름없는 그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도관 역을 맡았던 유해진의 역할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유해진은 반정부 시위로 투옥된 민주화 인사들의 비밀편지를 감옥 밖으로 전하는 비둘기였다. 위험을 무릅쓴 그의 노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신분 노출로 남영동에 끌려간 삼촌(유해진)을 대신해 조카(김태리)가 대신 비둘기가 되는 장면은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아픔에 아무 대가없이 헌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목숨을 걸고 송강호를 도와 그날의 진실을 바깥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던 무명의 택시운전사들처럼. 문득 황석영의 소설 속 글귀가 떠오른다.
사는 조건이 지식인 나부랭이들보다 훨씬 열악했던 그들은 잊혀지고 저희 혼자서들 감당하며 고난을 견디었지만 나중에는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군들 잊을 수 있으랴. 그들의 넉넉한 따뜻함과 시대 속에서 잊혀지고야 말 익명에도 당당했던 청춘을.
- 황석영 『오래된 정원』 중에서
이 대목은 장기수로 출소한 광주 민주항쟁 주모자인 주인공이 당시 공장 근로자로 순수하게 항쟁에 참여했다가 무참히 삶이 짓밟히거나 죽어간 이들을 추억하며 쓴 회고 부분이다. 거창한 신문기사나 뉴스보다 훨씬 큰 울림으로 남아있는 이 구절은 영화 <1987>에 등장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함성과 스크럽을 보면서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최루탄에 스러진 이한열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27일간 세브란스 병원을 지켰던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그토록 바랬던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민주주의. 2016년 겨울, 광장에 모여 함께 들었던 촛불은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영화는 잔잔하지만 깊이 1987년을 뜨겁게 살아낸 이들에게 고마운 안부와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나는, 영화 <1987>의 여운을 잊지 못해 책을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