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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21. 2019

원더풀 라이프

세 사람의 이야기- 선택하고 싶은 추억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1998), 그리고 세 사람의 이야기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래서 영화 속 서사는 마치 내가 지금 이 순간에 겪고 있는 일처럼 몰입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현실을 뛰어넘는 서사는 어떤 느낌을 줄까. 예를 들어 사후의 세계를 다룬 서사라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사후세계를 다룬 영화지만 판타지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너무 현실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건조하며 반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영화의 서사 공간 내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죽은 이들이 7일 동안 잠시 머무는 상상의 공간이다. 말하자면 죽은 이들이 거쳐 가야 하는 대합실 같은 곳이다.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내는 일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만 기억한 채로 영원한 세계로 떠나게 된다. 만약 행복한 순간을 찾지 못하면 림보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 3일 내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하면 그 순간을 영상으로 재현한다. 그런 다음에 시사실에서 영상을 관람한 후 그 순간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찾지 못한 사람은 계속 그곳에 남아서 다른 이들을 돕게 된다.

  누군가 죽었을 때 우리는 좋은 곳으로 가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말하는 좋은 곳이란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좋은 기억만 남은 심리적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좋은 기억을 찾기 위해 담당자와 인터뷰를 하는 캐릭터들은 배우가 아니라 일반인들이며 실제로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 이세야라는 캐릭터는 일반인이 아닌 배우, 이세야 유스케가 맡았는데 그는 결국 추억을 선택하지 못한다. 이세야는 아무리 행복했던 추억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머무르기보다는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을 상상하고 싶어 한다. 추억이라는 것도 어차피 상상이 가미돼 왜곡된 상태로 기억된 산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세야는 과거만을 고집하는 이곳의 시스템 자체에 불만을 표시한다.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어느 한순간에 계속 머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말한다. 미래에 하고 싶은 상황을 만들면 안 되냐고 조르지만 그는 이미 죽은 자다. 죽은 자에게 미래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래서 그의 요청은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고집한다. 결국 한 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추억을 선택한다. 그들이 선택한 추억은 바로 그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그들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고 추억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본 후에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추억을 더듬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소중한 추억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 영화 속에서라면 계속해서 정체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할 테니까. 나 역시 과거를 더듬어보면 선택하고 싶은 추억이 있을 것이다. 딱 한 가지만 고르라는 게 고민이 될 테지만.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추억은 무엇일지 듣고 싶어 진다. 오늘은 영화가 끝나고 모인 사람들에게 그 물음을 꼭 던져볼 것이다.

 



* 세 사람의 이야기 - 선택하고 싶은 추억


#1 정연의 이야기


  정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한다. 정연이 본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영화들은 조용한 가운데 가족 구성원들의 아픔이 깔려 있는 영화라서 좋았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자신의 상처를 나름의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삶의 무심함, 그 자체가 서사인 영화가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다. 특히 최근에 봤던 히로카즈 감독의 <바다 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가 잔잔한 가족 영화였기 때문에 오늘 영화도 기대를 하고 왔다. <원더풀 라이프>는 정연의 그런 기대를 깨는 영화다. 70년대 고등학교 건물 같은 곳이 사후 세계의 알 수 없는 공간이라니. 판타지 영화라기엔 너무나 소박한 무대 장치다. 분명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갔을 텐데 죽은 사람들은 모두 평상시에 입는 옷들을 입고 있으며 자신이 어제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도 태연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와 다를 바 없이, 거기에도 농담이 있고 해야 할 과제가 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쉽게 고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마감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고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선택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선뜻 고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일생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제공해 기억을 돕는다. 자신의 일생을 보는 느낌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연은 자신의 일생을 영상으로 되돌려본다고 생각하니 영 께름칙했다. 즐거운 추억보다는 버리고 싶은 추억, 수정하고 싶은 추억이 더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상을 본다면 후회만 거듭될 것 같았다. ‘저 때 저런 말을 하면 안 됐을 텐데. 저건 정말 내가 잘못했네’ 등등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와타나베 할아버지는 추억을 고르지 못해서 결국 일생이 담긴 비디오를 신청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작은 탄식을 한다. 그는 다정한 남편이 아니었다. 신혼인데도 아내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신문을 보면서 식사했다. 나이가 들었을 때도 아내는 돋보기를 낀 채, 혼자서 책을 읽고 와타나베는 그 옆 의자에 앉아 자고 있었다. 그에게 삶이란 그냥 주어진 숙제를 하듯이 묵묵하게 살아내는 과정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그에게 특별히 기억나는 추억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행복했던 순간을 꼭 집어 선택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인 기억이 없다는 것이 그에게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느낌을 준 것 같다. 땀을 닦으며 고민하던 그에게 해답이 떠오른다.

  어느 휴일 긴자 영화관 옆 중앙공원 벤치에 앉아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다. 40년간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그 벤치에 앉아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그 약속을 할 때만 해도 두 사람 앞에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단 한 번 같이 영화를 보러 간 게 전부였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그 벤치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일이 됐다. 한가한 휴일 오후 아내와 나눴던 사소한 대화를 기억해낸 와타나베는 자신의 행복이 대단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는 공원 벤치의 추억을 선택한다.


  정연은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심지어 그런 순간이 한 번이 아니었음도 깨달았다. 몇 살 때쯤이었을까. 아마 아홉 살 때쯤이었을 것 같다. 형제들이 많아서 늘 정신없고 소란스러웠던 집안이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정연이 걸터앉아 있던 툇마루로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정연은 읽던 동화책을 내려놓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티 없이 맑은 하늘에 구름이 보였다. 동화책에 나온 것처럼 하늘 위에도 세상이 있다면 그곳이 보일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 투명한 하늘이었다. 정연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그 순간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인 듯 느껴졌다. 자신 앞에 펼쳐질 삶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 때문에 막연하게 행복했던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성인이 돼서도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어릴 때 가졌던 그런 느낌이 몇 차례 더 있었지 싶다. 여름방학 때 가족끼리 바다로 놀러 가곤 했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서 화상을 입어 피부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놀았다. 그때 문득 쳐다본 하늘에는 어떤 근심거리도 없었다. 세상은 영원히 평온하게 흘러갈 것이고 그런 세상이 나를 포옹하고 사랑해줄 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근거 없는 행복과 충만감을 느끼기는 점점 힘들어졌다. 삶은 그렇게 맑고 투명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커가면서 마음속은 흙탕물이 되기 일쑤였다. 더러운 찌기가 가라앉고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시절 투명한 하늘과 얼굴을 맞대던 그 맑았던 순간을 정연은 이미 선택하고 있었다.  


#2 선희의 이야기


  선희는 영화가 끝나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시간에 참여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선희는 이해하기 좀 어려운 영화일 때 주로 참여했다. 자신이 이해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고 싶어서다. 오늘 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난 뒤에 미련이 남았다. 뭔가 정리가 필요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갈 시기를 놓치고 주저앉았다.

 

    22살에 필리핀 해전에서 전사한 모치즈키는 53년이 지난 후에도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치스키는 뒤늦게 자신이 누군가에게 행복을 줬던 순간을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약혼녀가 선택했던 순간이기도 하다. 모치스키는 약혼 뒤에 바로 전사를 했기 때문에 그의 약혼녀 교코는 다른 남자, 와타나베에게 시집을 간다. 그런데 교코가 죽은 뒤에 선택한 추억은 자신의 남편이 아닌 모치스키와 함께 했던 순간이었다. 모치스키와 함께 앉아 있었던 그 벤치의 기억이 쿄고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는 의미다.   


  선희가 누군가에게 준 기쁨과 행복의 크기를 잴 수 있다면 가장 큰 몫은 자신의 부모가 가져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선희는 자신이 귀하게 얻은 자식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결혼한 후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던 부모가 십 년 만에 얻은 아이가 바로 선희였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만한 나이의 자신을 앞에 앉혀 놓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터질 듯한 웃음만으로도 어떤 분위기였을지, 자신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그 뒤로 자라면서 부모 속도 썩히고 많은 근심거리를 안겨주었지만 사진 속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충만한 행복감을 주었던 완벽한 아이가 아니었을까. 그 사진이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사진 속 이미지는 영원히 선희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선희도 누군가에게 벅찬 기쁨이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했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에.       


#3 정호의 이야기


  정호는 영화가 끝나고 마련된 자리에서 진행자가 ‘영화에서처럼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선뜻 말하기가 꺼려졌다. 다른 사람들은 서정적인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을 솔직하게 밝혔다. 정호는 게임 세계 속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현실 세계의 문이 정호의 뒤에서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뒤로는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감과 몰입, 그러면서도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마치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물속이지만 그 안에는 정호가 호흡할 수 있는 산소가 녹아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오래 있어도 답답하지 않은 느낌이라고 할까. 정호는 애써서 진지한 표정을 만들고 말했지만 피식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게임하는 것을 쓸 데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여유를 즐기는 것이나 게임을 하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나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원더풀 라이프>에서 유일하게 십 대 소녀였던 캐릭터가 디즈니랜드에서 보냈던 추억을 택한 것을 정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보다 판타지에서 위안과 즐거움을 받는 사람도 있다. 정호는 죽은 후에까지 현실 세계 속에 남아 있고 싶진 않았다. 현실은 삭막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수십 개의 회사에 입사 지원을 했는데 서류전형을 통과한 곳은 극소수였다. 힘들게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해도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지금도 어느 한 곳에서 1차 면접을 통과한 뒤, 인, 적성 시험을 앞두고 있다. 정호는 바닷속 같은 촉촉한 게임 세계에 비해 뽀송뽀송한 현실 세계가 오히려 산소가 희박해 움직이기도 힘든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게임의 세계로 뛰어들면 숨통이 트였다. <원더풀 라이프> 같은 종류의 서사가 어떤 이들에게는 사후세계라는 설정으로 현실감이 떨어져 시시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정말 시시한 건 철저하게 조건으로만 이루어진 현실 그 자체다. 영화에서 끝까지 추억을 선택하지 않은 이세야는 그런 시시한 현실에 머무르기가 싫었을 것이다. 정호의 눈에는 최소한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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