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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26. 2019

디 아워스

민주의 이야기- 나를 쓰고 싶다

디 아워스 (스티븐 달드리 감독 2013)   

*민주의 이야기 - 나를 쓰고 싶다


  민주는 오늘도 상영시간에 약간 늦었다. 시간에 맞추려고 애를 썼건만 늘 약간씩 늦게 된다. 요새 불면증이 심해져서 어젯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탓이다. 오전에 살짝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배가 고파서 점심을 챙겨 먹고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영화의 초반부를 살짝 놓쳐버렸다. 게다가 시공간을 가로질러 다른 시대를 사는 세 여자들의 일상이 번갈아 등장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라는 정보만 흘려듣고 와서 처음에는 그녀의 전기 영화인 줄 알았다. 영화의 세 주인공인 버지니아 울프, 로라, 클래리사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면서도 서로 연결돼 있는 듯 우울하고 공허하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지시를 받거나, 타인을 위해서 산다.

  세 명의 여성이 마치 한 순간을 함께 호흡하듯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준다. 1923년 영국 리치먼드의 버지니아 울프는 괘종시계 소리를 듣고서, 1951년 로스앤잴래스의 로라는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 2001년 뉴욕의 클래리사는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나오는 첫 문장 ‘꽃은 직접 사 오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이다. 이 첫 문장을 세 사람이 반복한다. 한 손에 담배를 든 버지니아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소설의 첫 문장을 내뱉고, 로라는 침대에 앉아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을 읽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래리사는 자신이 직접 꽃을 사러 가겠다고 말한다. 로라는 남편 생일 파티 준비를 하고 클래리사는 친구인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한다. 세 사람 앞에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다발이 놓인다. 꽃과 파티는 분명 화려함과 즐거움을 의미해야 하는데 주인공 여성들의 얼굴엔 기대감보다 불안감이 서린다. 자신을 위한 꽃도 자신을 위한 파티도 아니다.  

  니콜 키드맨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의 얼굴도 매우 우울해 보였지만, 특히 두 번째 이야기로 건너뛰면서 등장한 로라 역의 줄리안 무어 얼굴을 보자 민주의 가슴이 먹먹해왔다. 로라는 겉으로는 상냥하고 다정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애를 쓰지만 무엇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공허함이 배어 있다. 출근하는 남편을 창문 밖으로 쳐다보면서 미소를 짓지만 남편의 차가 사라지는 순간, 미소도 싸늘하게 사라진다. 남편은 아내의 불안한 상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남편에게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거기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가 병약한 아내의 식사를 의사의 지시대로 규칙적으로 챙기듯이 로라의 남편 역시 시계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상의 궤도를 따라간다. 숨 막히는 반복이다.    

  로라의 불안함을 직감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로라의 어린 아들이다. 로라의 아들은 불안한 눈으로 엄마의 행동을 지켜본다. 어린아이는 엄마가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것을 예감한다. 자살할 작정으로 호텔 방을 잡은 로라가 수면제를 옆에 두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장면은 특히 소름이 돋을 만큼 인상적이다. 로라의 환상을 보여주듯이, 침대 밑에서부터 해초가 떠다니는 강물이 솟아 올라온다. 이 장면은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는 첫 장면과 연결된다. 버지니아는 정신분열증의 징조가 느껴지자 죽음을 택했고 로라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공허감으로 자살을 꿈꾼다. 두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려는 이유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이 내가 아닌 것처럼 무감각하게 느껴질 때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민주는 자신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지금 로라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울을 꺼내 확인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민주야말로 허공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인지, 지금까지 무엇을 성취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민주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신이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견고한 성이 모래성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심의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무너졌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성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다.

  민주는 원래 명랑한 사람이었다. 친구들 모임도 늘 민주가 먼저 주선했고 친구들은 농담을 자연스럽게 잘하는 민주가 와야 활기가 돋는다는 말을 했다. 민주에게는 그것또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즐겁지 않다. 전에는 친구들이 웃으면 자신도 행복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도 별 문제가 없고 주변 사람들도 자신을 좋아해 주니 그렇게 사는 것이 소박한 행복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민주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민주는 남편의 서재에 틀어박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민주의 주변에 특별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변과 교류하는 민주의 심리였다. 민주는 형제 많은 집의 맏딸이었다. 친정어머니는 민주에게 늘 맏이답게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그 말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 다른 가족들에게 불편함을 끼쳐선 안 된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여자는 튀지 않아야 하며 가정이 아무 탈 없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덕분에 큰 집의 맏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늘 친척의 칭송을 받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지칭하는 모범적인 여성의 전형이었다.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곧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안 제사 걱정을 하셨던 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사는 사라졌다. 아버지 형제 중 누구도 제사를 물려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생전에 몸이 아무리 아파도 제사를 건너뛰자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 제사도 아버지 제사도 사라졌다. 작은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제사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이었다면 왜 어머니에게만 그 짐이 지워졌던 것일까. 어머니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여자로서의 의무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어머니를 과연 행복하게 했을까. 민주가 옆에서 보기에 어머니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의무를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시집 온 여자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의무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민주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도 보이지 않는 규범처럼 민주를 감시했다.  ‘여자의 의무는 가족이 편하도록 뒷받침해 가정을 밝게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곧 행복이다.’라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그런 가치관은 가랑비에 옷 젖듯 민주에게 스며들어 있었다. 민주는 그것이 꼭 아내의 의무여서 행한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만족했다. 하물며 피붙이인 가족에게 베푸는 노력이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자신의 노력으로 무탈하고 행복하게 산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분란이 생기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자, 그런 생각은 더욱 강화됐다. 자신의 노력으로 깨끗해진 집안 환경을 둘러보는 것, 남편이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 아이들이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이었다. 그런 행복이 계속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민주가 생각했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자신만의 환상이었던가. 지금 민주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는 그동안 자신의 노고로 가족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가족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그냥 일상일 뿐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어 보였다. 자신이 하루 이틀쯤 게으름을 피워 집안일이 쌓여도 가족들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도움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대학생이 된 아이들은 집보다는 바깥일에 더 관심을 쏟았고, 원래부터 무심했던 남편은 민주를 유령 취급했다. 민주는 보이지 않는 천사가 아니라, 그냥 유령이었던 것이다.

 

  민주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건만 남편은 눈치 채지 못했다. 눈치챘다고 해도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도 아니다. 식사 때가 되면 식탁을 차리는 것도 설거지를 하는 것도 당연히 민주의 몫이었다. 기본적인 것들만 유지된다면 일상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물론 가족이 민주의 수고를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민주가 생각하던 행복의 환상이 깨졌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졌다. 가족 역시 타인이다. 민주의 달라진 마음에 대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민주 자신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나의 세상은 갑자기 변했는가.’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와 남편인 레너드 사이의 대화는 그들 관계의 문제점을 짚어준다. 짐작이 가능한 관계가 민주의 마음에도 작은 동요를 일으켰다. 레너드는 자신이 버지니아를 최대한 배려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레너드는 의사의 처방대로 버지니아를 통제한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절망한다. 레너드는 자신이 버지니아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경질적인 버지니아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 레너드에게 버지니아는 남의 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몰라주는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레너드는 자신이 세운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 그것이 세상의 기준이고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이 버지니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버지니아에게 세상이 정한 정상이라는 기준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레너드를 향한 감정은 미움이 아니다. 안타까움이다.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에 대한 안타까움.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세상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현 상태로선 그 방법이 자신과 상대방을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지니아는 레너드에게 고마웠다는 편지를 쓴 뒤, 외투 주머니에 돌을 채운 다음 강물로 들어간다.


  반면 자살을 결심하고 수면제를 든 채 호텔방을 찾았던 로라는 뱃속에 있는 둘째 아이를 생각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 대신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집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어린 자식 둘을 둔 채 집을 떠나 캐나다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로라가 자살을 결심하고 호텔을 찾을 때 들고 갔던 책이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다.


  대인기피증과 환청에 시달리던 버지니아의 힘든 삶을 버티게 해 준 것은 글쓰기였다. 자살로 마감했기 때문에 글쓰기가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로라가 살기 위해 가족을 떠났듯이 그들이 택한 것은 어쩌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민주에게 가장 공감이 가는 인물은 로라였다. 로라는 어린아이들을 버린 자신을 사람들은 욕하겠지만 자신에게는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죽음 같은 현실보다 삶을 택한 것이라고 한다. 남들에게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삶이 어떤 이에게는 죽음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민주에게 로라만큼의 절실함이 있었던가. 역설적이게도 젊었을 때, 자살을 꿈꿨던 로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됐다. 남편도 젊었을 때 암으로 죽고 자식 둘도 죽었다. 삶이란 참 허무하다. 그렇지만 그런 삶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다. 엔딩 시퀀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죽음을 선택한다 해도 남편과 함께 나눴던 시간은 행복했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한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고 자신이 이해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민주는 그런 불가능한 요구를 가족에게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주는 가족을 위해 자신이 희생해왔고 그런 희생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가족의 감정과 인정에 의존하는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이제 가족과 상관없이 나만의 독립적인 삶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는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자신은 없었지만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절실하다면 방법이 생길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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