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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23. 2019

아무르

혜신의 이야기- 불안이라는 불청객


아무르 (미하엘 하네케 감독 2012)

*혜신의 이야기 - 불안이라는 불청객


  혜신은 오늘 영화를 보러 올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베니의 비디오>, <퍼니 게임>, <일곱 번째 대륙>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하나 같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외면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하네케 감독은 혜신의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곱 번째 대륙>이란 영화는 평상시에 혜신이 지니고 있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회의, 불안감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해서 보는 내내, 넋을 잃고 봤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감히 추천할 수가 없었다. 그 영화를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알 수 없었고 그 영화에 공감을 느낀 이유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아무르>는 <일본 번째 대륙>이라는 영화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인 영화였다. <일곱 번째 대륙>에서 중산층 가정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회의, 무기력감이 일가족을 집단 자살로 이끈 충격을 보여줬다면 <아무르>는 늙고 병든 노년의 삶이라는 비참하고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일본 번째 대륙>이 표면적인 현실과는 분리된 무의식적 불안감과 회의를 다루고 있지만 <아무르>는 현실과 밀접하다. 노년부부 중 한 명이 점점 악화되어가는 진행형 질병에 걸렸을 때, 죽음밖에는 최선의 선택이 없다는 피하기 힘든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혜신은 어머니의 죽음을 상상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지금 노인 요양 병원에 계신다. 혜신에게는 오빠가 있었지만 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순전히 혜신의 몫이었다. 혜신은 결혼을 한 번 했지만 3년 만에 이혼했다. 어머니의 강권에 따라 선을 보고 적당한 상대를 골랐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껄끄러웠던 남편과의 관계는 혜신의 불안을 더 부채질했다. 이혼을 하면 안정을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불안감을 또 다른 먹이를 발견했다. 이제는 무슨 일이 터지면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이 혜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혜신의 불안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혜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금슬이 별로 좋지 않았다. 두 분 다 다혈질이라서 잘 부딪혔다. 늘 불꽃이 튀게 부부싸움을 했다. 어머니는 심할 때 근육 경련을 일으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손이 오그라드는 모습을 보면 혜신은 도망을 쳤다. 걱정보다는 공포가 앞섰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친척집 언니가 어머니의 손과 팔을 연신 주물어댄 후에야 근육이 풀렸다. 혜신은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왜 자신은 한 번도 어머니의 손을 주무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건강은 그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근육 경련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모습은 분명 충격적이었을 텐데도 기억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쁜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머릿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혜신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이라도 하게 될까 봐 늘 불안했다. 새벽녘에 들려오는 두 사람의 다툼 소리는 잠이 덜 깨서 현실로 미처 돌아오지 못해 무방비 상태인 혜신의 머릿속에 불안감을 밀어 넣었다. 게다가 다혈질인 어머니는 한밤중이건 새벽녘이건 갑자기 혜신의 방문을 열며 뭔가 큰 소리로 혼내는 일이 잦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어도 혜신은 가슴이 떨렸다. 자신이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데서 비롯된 불안감이 늘 혜신을 지배했다. 혜신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알고 보면 별 것이 아닌 일에도 쉽게 망연자실해지곤 했다. 작업 도중 컴퓨터가 다운됐다거나, 전구가 나가는 일상적인 일조차도 공포로 이어졌다. 위층에서 수도관이 터져 혜신의 집 천장으로 물이 새는 사고가 났을 때도 그랬다. 물을 머금고 불룩 튀어나온 천장을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집안 어딘가에서 작은 소리만 들려도 갖가지 불길한 상상으로 머리가 하얘질 때가 많았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갑자기 방문을 확 열어 제키며 ‘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겠지.’라고 말하는 상상을 한다. 그때마다 불안이 혜신을 덮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혼은 아니었지만 혜신이 예감했던 것처럼 두 분은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하게 됐다. 남편과 다툼이 많아졌을 때도 혜신은 결국 이혼까지 갈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고 역시 예상대로 그렇게 됐다. 혜신은 혼자가 되는 데 익숙하다. 학창 시절 때부터 마음에 둔 친구가 자신을 버린 일도 많이 겪었다. 이상하게도 사적인 관계는 지속되지 않았다. 혜신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매달리는 일도 없었다.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끊어질 관계라면 그냥 포기하는 편이 더 편했다. 그래서 혜신에게는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혜신은 늘 타인의 관심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혜신이 상대방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부담스러워하는 눈빛이 보였다.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부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게 됐다. 혜신이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자 곁에 머무는 친구도 없어졌다. 주변에는 오직 직장 동료들뿐이었다. 일로 만난 사람들은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그 점이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했다. 기대도 하지 않게 되고 뽀송뽀송하게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혜신은 어릴 때부터 걱정이 많은 아이였다. 파괴에 대한 공상이 많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평화로운 현실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상상을 수시로 했다. 어렸을 때는 그 원인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자신 안에 있는 불안감의 근원을 더듬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래서 혜신은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온라인 대학에서 심리 공부를 해왔다. 하지만 공부를 해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것 같다가도 다시 방향을 잃는 일이 반복됐다. 심리학 공부보다는 영화를 보는 것이 위안을 줄 때가 많았다. 자신의 삶과 직접 대면하는 부담이 적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해석할 때 오는 안정감이 있었다. 설사 불안감을 조성하는 서사라고 해도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평화가 찾아오곤 했다. 꾸며진 이야기로 받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눈앞에 펼쳐지는 이야기가 영화라는 틀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았다.


  <아무르>는 처음부터 뭔가 불안감을 안겨줬다. 조르주와 안느는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로 교양 있고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안느 제자의 콘서트에 나란히 참석하고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다. 이 평화로운 가정에 모종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불안의 시작이다. 두 번째 공격은 안느의 신체에서 나타난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중에 안느가 갑자기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수술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온 안느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된다. 조르주의 불안감이 전달되는 장면이 있다. 하네케 감독은 암전 장면을 의도적으로 오래 지속시킨다. 보통 5초 정도로 끝나는 암전이 1분 이상 지속되는데 그 사이에 관객의 불안감도 스물스물 상승한다. 상영 장치에 문제가 생긴 건가 의심이 드는 순간,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리면서 화면이 밝아진다.

  오른쪽이 마비됐지만 언어나 사고 기능이 정상일 때는 그나마 자신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다. 안느는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책을 읽고 옛 앨범을 들추는 등 소일거리를 하면서 현실의 괴로움을 잊고자 한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으니 가서 할 일을 하라고 남편에게 꿋꿋한 모습을 보인다. 콘서트를 했던 제자가 찾아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때도 반신불수는 노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서 화제를 돌린다. 안느는 전동 휠체어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안느는 시간이 자신을 어떻게 좀 먹게 될지 알고 있다. 결국 인지 능력이 점점 저하되면서 안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안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하는 간병인은 안느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어린아이 취급을 한다. 안느가 형편없이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기 두려워하는 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거울을 들이밀며 ‘머리를 빗으니 예쁘죠?’를 반복한다. 정신적인 폭력이다. 화가 난 조르주는 간병인을 해고한다. 늘 반복적으로 ‘아파’라는 말을 반복하는 안느를 지켜보던 조르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옆에 있는 베개로 안느를 짓눌러 질식사시킨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라 충격적이다. 아내를 질식사시킨 것은 결코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이상 비참해지기 않기 위해,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둘이 함께 이승의 삶을 끝낼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사표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안느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5년째 요양 병원에 있는 혜신의 어머니는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고 있다. 했던 이야기를 10분마다 반복하고 횡설수설하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화가 가능하고 의사표현도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주는 것도 고역이다. 혜신은 자신의 인내심이 그렇게 쉽게 바닥이 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주말마다 면회를 갔지만 점점 기간이 늘어졌다. 어머니의 멍한 눈을 보는 것도 괴로웠지만 어머니가 내 면회를 반긴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양병원 간병인들도 가족이 자주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안 보는 사이에 간병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항상 깨끗한 모습으로 좋은 냄새를 풍기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위안을 받는다. 요양 병원 이외에 차선책도 없다. 직장 생활하느라 피곤한 혜신은 그렇게 깔끔하게 어머니를 돌볼 자신이 없다. 혜신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무서워했지만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초점을 잃은 어머니의 눈빛은 당당하고 매서웠던 눈빛보다도 더 공포스러웠다. 어머니는 분명히 고통을 겪고 있을 터였지만 그 고통이 혜신에게 전달되지 않은 사실이 더 무서웠다.

  <아무르>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딸 역의 에바는 일반적인 자식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질적인 도움은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어머니의 모습은 그냥 에바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고사하는 식물 같은 안나를 보면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엄마를 저렇게 둘 거냐면서 아버지를 다그치는 일밖에 없다. 혜신 역시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식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어머니가 지속적으로 고통을 호소했다면 혜신 역시 조르주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엄마란 감당하기 버겁고 버리기에는 가슴이 찢어지는 존재다. 깊은 밤에 혜신의 휴대폰이 울린다면 그것은 아마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혜신은 어쩌면 자신이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르>의 엔딩 씬은 경찰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고 텅 빈 노부부의 아파트를 에바가 둘러보는 장면이다. 에바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다. 에바의 표정 역시 주인 없는 빈집처럼 텅 비어있다. 그런데 혜신은 텅 빈 집에 앉아 있는 에바가 평온해 보였다. 공허하지만 어떤 불안도 위험도 없고 부모에 대한 추억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혜신은 조르주의 집안에 침입했던 비둘기를 생각했다. 비둘기들은 두 번 조르주의 집안으로 들어온다. 조르주는 첫 번째 비둘기는 창문을 열어 쫓아냈지만 두 번째 비둘기는 모포를 덮어서 잡아 품에 안는다. 혜신의 마음속에 침입한 불안이란 이름의 비둘기는 끊임없이 날아다닌다. 혜신은 자신의 비둘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생각했다.  

  <아무르>의 주제는 존엄사이지만 그 영화에서 혜신이 본 것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불안이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불안, 그리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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