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토끼몰이

송정민 씨 사건을 보면서

by 이화정



한강 공원에 2백명이 모여서 허무하게 죽은 손정민씨를 추모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가장 소중한 아들을 잃고 껍데기만 남아 있을 아버지의 마음을 타인들의 마음이 채워줬을 거라는 생각에 작은 위안이 됐다.

자식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이런 소식에 가슴이 미어져올 것이다. 군대에서 사망사고가 났을 때도 특전대원이 고문을 가상한 모의 훈련을 받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행상황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섬칫해졌다.

이 사건은 이제 그 아버지의 서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서사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서사는 결말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는, 주인공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쪽으로 고이게 된다.


일단 감정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행적이 의심스러워진다. 사람들에게는 서사를 완성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의 아버지 서사는 여러 거친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한 다른 젊은이들의 죽음에 비해, 끄는 힘이 강하다.

내 또래의 어머니들은 "굉장히 똑똑한 애인데다 외아들이었다는데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라는 말부터 꺼낸다. 이 말은 보편적인 것처럼 들리고, 그 말에 화를 낼 사람은 없겠지만 알고보면 참 잔인한 말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의대생의 죽음이라는 제목에 무게가 느껴지듯, 잘생기고 똑똑한 젊은이의 죽음이라는 사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아버지의 태도다. 익숙한 풍경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떠올리고 싶지조차 않을 것 같은 아들의 죽음을 분 단위로 추적해가고, 몸을 사리지 않았던 민간구조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무능하다고 지탄받아왔던 공권력에 비해 아버지의 추리력과 추진력은 훨씬 유능해보인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역시 그런 이미지에 딱 어울린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추리력이 객관적으로 합당해보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버지가 의문을 제기한 마지막 40분의 행적은 우리도 궁금하다. 어떻게 살아있던 사람이 그 순간을 넘기면서 죽음을 향해 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고 해도 혼자만 살아 집으로 돌아온 아들 친구에 대한 원망을 누르기 힘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인간적인 원망과 아들의 죽음을 완전하게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합쳐져서 잘못 된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 같아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친구는 만취한 탓에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익숙한 워딩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말조차 비웃는다. 자신의 행위를 분 단위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다. 자신이 어느 순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다른 사람이 수긍할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살면서 숱하게 경험해왔던 일이다.

나는 그 사건이 나오고 그의 아버지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손씨의 친구를 범인으로 단정 짓고, 성토의 글을 올리는 페친을 삭제했다. 너무 불편해서다.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길 바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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